[Dispatch=김지호기자] 이정재, 이병헌, 공유, 임시완, 강하늘, 위하준, 이진욱, 박성훈, 탑, 조유리, 원지안….
인지도로 따졌을 때, 이서환은 사실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게, 이서환은 그간 주로 신스틸러로 활약해왔다.
'오징어 게임' 시즌1에서도 성기훈(이정재 분)의 친구로, 아주 잠깐 등장했다. 성기훈과 함께 경마 도박에 빠진 친구.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시즌2가 공개되고, 의외의 반전이 일어났다. 이서환이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연기를 펼친 것. 리얼한 생활 연기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몸살로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거든요? 본명 '이영기'를 적고, 마스크·안경·모자를 썼어요. 그런데 간호사 분께서 '오징어게임 잘 봤어요' 하시는 거에요! 너무 감사했죠."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 바로, 배우 이서환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다. 지금 그는, 연기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디스패치'가 최근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서환을 만났다. 카메라 아래서도 유쾌하고 수더분한, 그의 매력을 확인했다.
◆ "준비는, 언제나 돼 있다"
이서환의 데뷔는 지난 2004년이다.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로 무대 연기를 시작했다. 이후 드라마 14편(오징어게임 제외), 영화 21편, 공연 20편을 소화했다.
조연과 단역을 가리지 않았다. 영화 '핸섬가이즈'의 부동산 사장(조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박소장(단역),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영배(조연) 등이 모두 그의 작품.
20년의 내공만큼, 연기력 하나는 보증이다. 그의 장점은 친화력. 편안하고 소탈한 인상 덕분에. 어떤 옷을 입혀도 위화감 0%다. 극에 찰떡같이, 그대로 녹아든다.
"제가 하는 연기는, 보시는 분들에게 부담이 없어요. 친근하죠. 그런데 아무도 기억을 못 해요. '그 친구 잘 하는데!', '그 친구 누구지?' 항상 이런 반응이었어요.(웃음)"
◆ "기회가 왔고, 잡았다"
시즌1에선 분량이 미미했다. 이서환의 입장에선, "평소 하던 대로"였다. 그러나 시즌2에서는 대사도 비중도 대폭 늘어났다. 기분 좋은 이변이다.
"그동안 해왔던 역할들은, 작은 역할들이 많았어요.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역할도 아니었고,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았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시즌2 캐스팅을 듣고,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시즌2의 첫 광고를 볼 때까지만 해도 제가 출연할 줄 몰랐었다"며 "연락을 받고 대본을 읽는데 '와!' 소리가 나왔다. 분량이 많더라"고 미소지었다.
하지만 부담감도 컸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의 무게가 있지 않나.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걸 느끼는 순간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회상했다.
◆ "총을 든 소시민, 정배"
이서환이 연기한 정배는 소시민 그 자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아저씨. 그러나 매력적이었다. 용감하고, 정의롭고, (때론) 러블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제가 생각한 정배의 첫 모델은, 루프탑 코리안이었습니다. 1992년 LA 폭동 당시의 동네 아저씨들이요. 평범한데, 총을 잡는 거죠. 이 분들 중 한 분만 따라잡아도 되겠다 싶었어요."
SBS-TV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022년)를 참고했다. "이후 기사도 찾아보고, 그 분들 사진도 봤다"며 "우리가 알던 아저씨들이 아니었다. 정말 멋졌다"고 감탄했다.
총기를 다루는 모습도 연습을 거듭했다. "제가 민방위라 총을 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유튜브를 보며 연구했다"며 "아파트 뒤에서 혼자 휴대폰을 세우고, 연습하고 찍고 비교했다"고 전했다.
◆ "정배의 마음은, 이런 것"
외형 뿐만 아니다. 정배의 심리도 디테일하게 그려나갔다. "우선, 정배는 프론트맨(공유)이고 뭐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다. 기훈이 말해도 '어디까지 믿어야 해?' 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정배가 기훈과 올라가며 '넌 영일 씨(이병헌 분)랑 같이 가면 되지, 왜 나랑 가냐?'고 묻죠. 기훈이 '네가 내 친구잖아'라고 해요. 여기서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뭐든 다 해줄 수 있다'고 다짐하게 돼요."
영일을 대하는 미묘한 태도에 대해서는 "영일이 그렇게(살인) 해주지 않으면, 정배 역시 죽을 거란 위기감이 있었다. 그래서 영일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워한 것"이라고 심리를 짚었다.
"대호(강하늘 분)요? 정배의 해병대 후배잖아요. 정배는 그걸 믿고 있기에, 탄창을 안 가져왔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거라 생각했죠. 그렇게 연기했어요."
◆ "정배는, 이서환의 발견"
본연의 탄탄한 연기 내공에 운까지 따랐다. (실제로, 주연 이정재는 오히려 지나치게 힘 들어간 연기로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탑 역시 과장된 연기로 혹평의 대상이 됐다.)
주목을 예상했을까? 그는 웃으며 재치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 당연히 예상했죠. 캐스팅을 보시면, 모두 단독 주연급의 배우들이 전부입니다. 제가 그 사이에서 비중이 커요! 튈 수밖에 없지 않아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 걸요."
그는 "단역과 조연을 할 땐, (사람들이) 잘 기억을 못 해주셨다. 요즘은 많이 알아봐주신다"며 "아내가 요즘 등을 펴고 이야기한다. 딸에게는 옆반 선생님께서 악수하고 가셨다더라"며 기뻐했다.
◆ "이서환, 이 배우의 내일"
현재 이서환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얼떨떨하다. 그 전엔 미팅을 하고, 연기를 미리 준비해 보여드려야 했다. 그런데 작품 오픈 이후로 '같이 하자'고 그냥 연락이 오신다"고 행복해했다.
"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오겜'은 제게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어요. 따뜻하고 좋은, 아름다운 풍경이죠."
물론, 그는 잘 알고 있다. 인지도는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해 왔던 대로, 성실히 연기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 뜨거움을 느끼고 싶진 않아요. 그러면 어깨에 뽕 들어간 연기를 할 것 같아서요. 최대한 정제하고 있습니다. 더 멀리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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