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우민호 감독은, 약 3년 전을 떠올렸다. '하얼빈' 연출 제의가 들어왔을 때다. 우 감독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고 판단했다.
"어떤 감독이 그렇게 쉽게 안중근 장군을 다룬 영화를 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잘해야 본전인 걸요."
그도 그럴 게, 전국민이 아는 이야기다. 자칫 진부하게 느낄 수 있다.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하면, 왜곡 논란이 생길 지 모른다.
하지만 우 감독은 운명처럼 마음을 바꾸게 된다. 서점에서 안중근의 자서전을 읽었고, 큰 감동을 받았던 것. 안중근 장군의 말씀을 꼭 전달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그 분께서 30살이었던 게 너무 놀랍더라고요. 하얼빈 의거까지의 과정도 고난이 많았고요. 그럼에도 불구,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만 했던 거죠. 제게 확 와닿았습니다."
결심이 섰다.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 "혹시 감독을 구했느냐"고 물었다. (예상대로) 아직 감독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 우 감독은 즉각 "제가 하겠다"고 답했다.
단, 조건이 한 가지 있었다. 장르를 바꿔야 한다는 것. 우 감독이 처음 접한 '하얼빈'의 대본은 순수 오락영화였다. 우 감독은 "숭고하게, 묵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오락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오락영화로 해야 했다면, 전 안 찍었을 거에요. 제게 그 분의 자서전과 독립군들의 희생이 너무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민호 감독이 전하는, '하얼빈'의 시작이다.
◆ "하얼빈, 출발부터 묵직했다"
우 감독의 주 전공은 현대사다. '내부자들'(2015), '마약왕'(2018), '남산의 부장들'(2020) …. 주로 악인들을 내세워 격동의 현대사를 꼬집는다.
이번엔 115년 전의 과거로 향한다. 그것도 일본제국주의의 엄혹한 탄압을 받던 시대. 외롭고 고통스럽게 투쟁해온, 독립투사들을 다룬다.
"악당들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 분들에게 그래선 절대 안 됐어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안중근의 모습과 마음을 왜곡할 지 모른단 걱정이 컸거든요."
우 감독은 시작점을, 안중근 자서전의 연설에서 찾았다. 이는 우 감독이 관객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연설은 엔딩 내레이션에 삽입했다.)
"우리들이 단 한 번의 의거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건 명백한 일입니다. 첫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을 해야 하며 백 번 꺾여도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중근)
그는 "내레이션에서 '불을 들고 가야 한다'는 건, 제가 만든 대사다. 그 외에는 실제로 하셨던 말씀을 사용했다"며 "관객이 힘들 때 이 영화를 끄집어내 보고, 힘을 얻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결국, 하얼빈 거사가 밑거름이었을 겁니다. 그로 인해 다음 세대가 살아가고, 또 밑거름을 만들고…. 그렇게 지금처럼 무너지지 않는 한국이 되길 바라셨을 겁니다."
역사극을 다루는 만큼, 열심히 자료를 찾고 연구했다.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꼼꼼히 공부했다.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총독부에 왔을 때 했던 실제 발언에서 방향성을 찾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이란 나라는 참 이상하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요. 왕과 양반, 유생들은 무섭지 않지만 저잣거리 민초들의 눈빛은 섬뜩하고 서늘하다고요. (이토가) 맞게 본 것 같아요."
◆ "독립투사들, 이렇게 모였다"
다음은, 캐스팅. 우민호의 마음 속 안중근은 고민없이, 현빈이었다. "그 분이 하얼빈에 가는 과정의 고뇌를 담아보고 싶었다. 두려움, 번뇌, 갈등 등 복잡한 느낌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사보단 눈빛이 중요했습니다. 처연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고뇌하듯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꺾을 수 없는 신념이 있는 눈빛 말입니다. 현빈에게 바로 그런 게 있었습니다."
삼고초려 끝에 성공했다. "조금씩 책(대본)을 고쳐 건넸다. 포기하지 말라는 장군님 말씀을 되새기며 될 때까지 주려 했다. 만일 현빈이 수락하지 않았다면, 4고 5고 계속 건넸을 것"이라 미소지었다.
조우진(김상현 역)은 우민호가 사랑하는 배우다. '내부자들'과 '마약왕'에서 악인을 소화했다. "갑자기 이 배우와 (악인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작업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독립군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조우진이 선뜻 대본도 보지 않고 '하겠다' 했다가, 나중에 대본을 보고 기겁해서 전화가 왔어요. '감독님! 어떡해요 이거?' 하더라고요.(웃음)"
박훈(모리 중좌 역)은 알고보니, '남산의 부장들' 출신이다. "이병헌의 정보원 역을 연기했고, 정말 연기를 잘해줬다. 그런데 통편집을 했다. 미안한 마음에, 절대 통편집 없을 역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박훈이 선뜻 해줬습니다. 전체 일본어 대사가 되게 어려운 숙제였을 겁니다. 일본인들이 봤을 때도 어색하지 않았으면 했죠. 박훈이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맹연습했고, 결과도 완벽했죠."
'하얼빈'의 특별한 손님, 정우성(박점출 역)도 매력적이다. 길을 잃은 독립운동가이자 마적으로 등장한다. 그 캐스팅에 대해서는 "이 여정을 버텨낼 배우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단 한 장면을 위해 몽고까지 와야 했습니다. 울란바토르까지 16시간이 걸리고, 촬영지까지 1박 2일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죠. 정우성은 이 대본의 의미를 알고,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고마웠죠."
◆ "혼신을 다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촬영에는 6개월이 걸렸다. 영화 속 만주를 찍기 위해 몽골로 날아갔다. 블라디보스토크 장면은 라트비아에서 만들었다. 전투 장면들은 한국 각지를 돌며 완성했다. CG 없이 100% 실사로 선보였다.
"광활한 대지와 대자연의 스펙터클함, 그리고 웅장함을 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독립군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그 드넓은 곳에서 정작 땅 한평 없으니, 쓸쓸하고 약해보이지 않았을까요?"
우 감독은 "그렇지만 동시에, 하얼빈으로 계속 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며 "그렇게 숭고하게 만들고 싶었다. 카메라 역시 현존하는 디지털 카메라 중 가장 좋은 기종을 썼다"고 말했다.
디렉팅 덕분일까? 현빈과 이동욱을 포함한 배우들은 인생연기를 펼쳤다. 우민호는 "배우도 사람이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하는 것과, 대자연에서 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런 대자연과 오지에 데려가니 리얼한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졌을 거에요. 육체는 힘들었어도, 그 분들의 영혼과 정신을 그대로 보여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산아산 전투다. 생지옥을 연출하려 총 10회차, 약 20여 일을 촬영했다. "원래 그 신은 눈이 배경인 장면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6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회상했다.
"제설작업부터 해서 10시간을 기다려 한두컷을 찍곤 했어요. 배우들도 너무 힘들어했죠. 보조 출연자들에게도 너무 고맙습니다. 이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시고, 추위에도 최선을 다해주셨어요."
하얼빈 의거 신도 이 영화의 백미다. 감독은 총격을 가한 후, 현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았다. 대신 카메라 시선이 허공에서 아래를 향하도록 했다. 동시에 현빈이 "까레아 우라"를 부르짖게 했다.
"보통 총격 신은, 맞는 얼굴과 쏘는 얼굴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저는 반대로 먼저 간 동지들의 시점으로 찍고 싶었습니다. 현빈에게 '하늘에 있는 동지들까지 듣도록 외치라'고 주문했습니다."
◆ "하얼빈은, 운명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음)"
우민호 감독은, 언론시사회 중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독립군들을 떠올리며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인터뷰 도중 눈물의 의미를 묻자, 감독은 겸연쩍게 웃었다.
"저 뿐만 아니라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런 희생을 할 수 있을까? 그 분들께 고맙고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는 "이 감정이 갑자기 그날 밤 본 뉴스 화면과 오버랩되며 울컥했다"며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했을 때, 온몸으로 막던 시민들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2024년, 저는 뉴스에서 영웅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계엄군을 막아섰던 바로 그 시민들이죠. 이토 히로부미가 '민초들의 눈빛이 무서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어요. 물론, 대사는 훨씬 전에 썼지만요."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민호 감독은 "부담감이 컸기에, 역대 가장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작품이다. '이 길이 맞나?' 수십 번을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런 만큼 결과물이 만족스럽다"고 알렸다.
"역대 가장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영화입니다. 원했던 방향대로 나왔어요. '하얼빈'은 제 모든 영화를 통틀어 첫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우리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자랑스러워요."
마지막으로, 우민호 감독에게 '왜?'를 물었다. 항상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의 차기작은, '메이드 인 코리아'다.)
"그게 저도 이상합니다. 한 작품 끝날 때마다 '다신 안해!' 하거든요? '남산의 부장들' 때도 그랬고, '하얼빈'을 마치고도 '절대 안해' 했어요.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또 찍고 있더군요.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제게 (작품이) 주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제공=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