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장을 빛낸 K팝, 다시 만난 세계를 넘어 다시 만날 세계로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 나는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를 서둘렀다. 목적지는 국회의사당 앞. 그렇다. 나는 국회 앞에 사는 남자다.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에 내린 나의 머리 위로 공수부대의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뿜으며 국회의사당으로 날아갔다. 곧장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나는 한달음에 모인 수많은 시민과 뒤엉켜 있었다. 겁이 났다. 10년 전 '안녕들하십니까', 8년 전 광화문의 촛불 행렬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그때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윽고 모두가 산자의 음성을 따라 소리를 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올해 차가운 저항의 광장에서 들었던 첫 번째 노래였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나서 12월 14일 토요일을 맞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집 앞 국회대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와 함께했다. 지난 7일 탄핵소추안이 부결되던 순간에도, 그다음 날부터 시작된 국회 앞으로부터 국민의힘 당사까지의 행진도 거리에 나섰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의 가결을 기다리며 국회대로 앞으로 향했다. 한 시간이 하루 같던 조마조마한 기다림의 시간, 결정 직전에 나온 곡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였다.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진 순간, 모두가 기다렸고 또 목 놓아 불렀던 노래의 도입부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12월의 투쟁은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출발하여 '다시 만난 세계'에 도착했다.
광장의 풍경은 정말로 '다시 만난 세계'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유령도시처럼 휑했던 여의도의 밤거리가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으며 고동쳤다. 그 중심에 이삼십 대 여성들이 있었다. 각자 응원하는 아이돌 그룹의 응원 봉을 들고 거리에 나선 여성들이 집회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실제로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의 서울시 생활 인구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여의도 탄핵 집회 참가자 추정 인원 중 20대 여성 비율이 18.9%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다고 한다. 12월 7일 토요일의 대규모 집회 앞 2~30대 여성 비중은 29.7%에 달했다. 시위 문화는 달라졌다. 차분한 질서와 냉철한 분노, 그 와중에 흥을 잃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광장의 인원들을 연결했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음악이 케이팝이었다. 여성들은 각자 지지하는 아이돌 그룹의 응원 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사뭇 다른 거리 풍경에 집회 주최 트럭은 오래된 민중가요 대신 케이팝 메들리로 재생목록을 고쳤다. 에스파의 '위플래시(Whiplash)' 구호에 맞춰 '탄핵 탄핵'을 유도하고,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시작하는 '영원한 건 절대 없어'에 맞춰 다 같이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는 축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데이식스의 '웰컴 투 더 쇼(Welcome To The Show)'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도 단골 선곡이었다. 케이팝 팬들이 민중가요를 배우고, 기성세대가 집회 현장에서 즉석에서 열리는 케이팝 응원봉 강의를 듣고 케이팝 플레이리스트에 귀를 기울였다.
응원봉이 처음 등장한 시기가 케이팝이 한국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거머쥔 200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2007년을 보자. 소녀시대가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했다. 원더걸스가 'Tell Me'로 국민 아이돌이 되었다. '소녀시대', ''키싱 유(Kissing You)', '소 핫(So Hot)', '노바디(Nobody)'가 이어졌다. 빅뱅이 '거짓말'과 '마지막 인사', '하루하루'를 통해 국민 그룹에 등극했다. 당대 가요계의 지독한 불황을 몰아내고 헤게모니를 거머쥔 케이팝의 시대였다. 널리 불리고, 다수가 알고 있는 음악이 민중가요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제로 지난 10일간의 집회에서 등장한 케이팝 노래는 보편적 인지도를 갖춘 곡이었다. 가능한 많은 이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케이팝이 투쟁의 중심에 섰다. 오히려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이 음악에 익숙지 않아 리듬감 있는 구호를 만들지 못하거나, 대중을 포섭할 수 있는 선곡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었다. 빅뱅과 싸이 등 버닝썬 게이트에 연루된 음악가의 노래에 시위대가 야유를 보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케이팝이 집회의 중심으로 주목받는 작금의 상황은 분명 독특하다. 그러나 대단히 낯선 풍경은 아니다. 정확히는 어렴풋이 그려보았던 미래가 커다란 스케일로 확장된 모습에 가까웠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이화여대 점거 농성에서 불린 것이 어느덧 2016년이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며 코웃음 친 김진태 현 강원도지사의 발언에 맞서 시민들이 LED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나온 것도 같은 해다. 그런데 '다시 만난 세계'가 처음 집회에서 불린 곳은 이화여대가 아니었다. 한 해 전 제16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다시 만난 세계'는 이미 집회의 주제가로 모두를 열광케 했다. 2021년에는 소녀시대 멤버 티파니가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다시 만난 세계' 주제가 선정에 지지하는 영상을 보내기도 했다. 성소수자 운동은 케이팝을 집회와 결합하며 거리 행진 및 인권 운동의 핵심 장르로 그들을 정의하는 공간이다. 이번의 탄핵 집회가 가장 많은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을 호명한 집회였음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케이팝은 거리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케이팝은 지난 8년간 여성 운동, 소수자 운동, 인권 운동 등 수많은 운동의 현장에서 불려 왔다. 한국 사회 여러 현상에 관심을 두고 엑스(구 트위터)를 중심으로 여론을 개진하는 2~30대 여성 집단에 케이팝은 2000년대를 기억하는 마지막 국민가요이자, 오늘날 자신의 취향을 강력하게 투영하는 구심점으로 기능한다. 또한 이들은 여성혐오의 물결과 가부장제 폐단 및 범죄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사회 정의를 감시하는 집단이다. 2020년 미국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과 태국 민주화 시위에서도 케이팝이 울려 퍼졌고, 팬덤이 케이팝 아티스트에게 입장 표명을 촉구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인 현상에서 특정 세대에게 케이팝이 온라인 팬덤 문화를 향유하는 다양한 개인의 결속을 진행해 왔으며, 오프라인 공간으로의 출현까지 나아갈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024년의 우리는 철저히 반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 음악을 고수하는 케이팝이 정치와 결합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케이팝이 국민가요의 지위를 잃고 팬덤 중심의 소비로 재편된 오늘날에는 그 경향이 더욱 분명해졌다. 되짚어보면 1990년대 케이팝이 처음 등장했을 때 H.O.T., 젝스키스 등 그룹의 메시지는 학교폭력과 사회적 재난을 다루는 등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케이팝 아이돌 간의 기본 구도는 경쟁이었고 팬덤은 피아식별을 위해 서로 다른 색의 풍선을 손에 들었다. 배타적인 대중음악의 편 가르기와 미디어 권력이 부추기는 다툼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긴 시간 대립과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케이팝이 커다란 서브컬처로 굳어진 시기는 2010년대 이후 음악 소비의 변화와 케이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스트리밍 플랫폼 차트의 '줄 세우기'가 지나가고 '초동 판매량'을 위시한 앨범 판매량과 각종 시상식의 투표 결과가 아티스트의 인기를 증명하는 오늘날이다. 케이팝은 공통이 즐기는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분열된 세계 속 작은 피난처이자 공동체의 경험을 함양하는 소형 광장, 아티스트가 팬덤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생태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규모가 불어나며 세계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순간이 우리가 지난 몇 년 간 목격한 케이팝의 세계 시장 성공이다.
케이팝은 그래서 한국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있지만 동시에 하위문화의 속성을 갖는 독특한 지위를 겸하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케이팝 팬덤이 정치적인 이익집단이자 반문화적 성격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케이팝 그 자체에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케이팝은 정치와 단호히 선을 긋는다. 간혹 몇몇 아이돌 멤버가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의제를 은유하는 메시지의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나, 기본적으로는 '아무런 입장도 드릴 수 없다'가 익숙한 산업이다. 긴 시간 동안 케이팝은 기획사가 주도하는 인권침해와 개인의 의사 표출 제한을 묵인해 왔으며, 그 대가로 확보한 활동 인원의 젊음을 상업화하여 최대의 수익을 창출해 온 제작 시스템이다.
팬덤은 케이팝의 모순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고 직시하는 집단이다. 그렇지만 지지하는 '최애'를 위해 감정을 삭이고 불합리한 정책을 따르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제는 집회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응원봉이지만 그 가격은 만만치 않다. 2006년 등장 당시 만원 후반대였던 가격은 오늘날 4~5만 원 이상을 호가한다. 콘서트 날이 임박하면 이 가격은 배로 늘어나 10만 원대 후반부터 20만 원대 중후반까지 치솟는다. 기획사가 마음대로 가격을 책정하며 상술을 벌여도, 그렇게 만든 머천다이즈가 엉망인 품질이라도 팬덤은 지갑을 연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콘서트 티켓 가격과 갈수록 늘어나는 머천다이즈 종류, 차가운 새벽에 진행되는 음악 방송 사전 녹화, 일부 직원들의 무례한 태도까지 견딘다. 사랑으로 뭉쳤으되, 언제든 조직적인 분노를 표출할 준비가 되어있는 집단이다.
실제로 최근 팬덤은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집단행동을 통해 케이팝 산업에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작게는 트럭 시위와 근조 화환을 보내는 입장 표명부터 크게는 기후 위기에 대항하여 기획사에 기후 행동을 촉구하는 집단 케이팝 포 플래닛(K-pop 4 Planet)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유료 멤버십 메시지 서비스 소홀, 열애설에 대한 질책 및 사이버 불링 등 어두운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팬덤이 단순한 소비자로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양면성이다. 팬덤과 아이돌 그룹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으로도 볼 수 있다. 집회 현장에서 응원하는 '최애'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는 피켓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던 원인이다. 개인과 집단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누가 권력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선한 영향력도, 악한 영향력도 발생할 수 있는 시기다.
이번 탄핵 시위만큼은 정치 세력으로의 케이팝 집단행동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여러 그룹을 응원하는 '잡덕'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응원 봉 대통합의 물결을 이뤄냈다. 구분 짓기를 위해 들던 응원 도구는 혼란하고 두려운 광장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격려하는 응원의 불빛을 밝혔다. 광장에서 우리는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가는듯 했던 케이팝이 젊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고, 케이팝을 통계와 성적으로 이해하던 이들은 그 위력을 직시했다. 더는 광장에서 혐오를 부르짖는 이들은 용납될 수 없다. 어른의 시선이 아닌,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청소년 세대를 위한 케이팝 실무자들의 고민과 인식 개선도 시급해졌다. 올해 드러난 여러 경영 미숙과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으로는 공감을 얻을 수 없다.
탄핵 가결의 기쁨은 잠시였다. '다시 만난 세계'의 선율과 함께 인파를 헤치며 나는 다시 한번 불안해졌다. 혹여 이날의 승리가 그저 광장에서의 작은 축제로 끝나는 건 아닐까.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를 기다려야 하고 대통령은 끝까지 싸우겠다며 몽니를 부린다. 야당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그 외 모든 소외당하는 사람들,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 한 페이지의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난 10일 간의 집회, 그리고 집회에서 울려 퍼졌던 음악을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에 작별을 고하고, '다시 만난', 아니 '다시 만날 세계'에서 노래할 수 있을 테니.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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