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상준'이 겪는 상황은 자연재해 같다. 예기치 못하게 덮쳐온다. 그 잔해들은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에게 직접적인 잘못은 없다.
마치 개구리 같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 '누가 그 돌을 던졌을까', '왜 내가 맞았을까'만 되풀이한다. 그래서 슬프다. 윤계상은 그런 상준에게 120% 몰입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노인의 모습을 위해 3주 만에 14kg도 감량했다. 20년간 고통에 잠식된 채 피폐해진 상준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본인의 연기에 만족하냐고 물었다. 그는 "잔인하다"며 멋쩍은 듯 웃더니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다. 좋았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 개구리들의 이야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극본 손호영, 연출 모완일)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한여름 찾아온 수상한 손님으로 인해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중 플롯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전혀 연관 없는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로 이어진다.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된다.
윤계상은 이러한 독특한 형식에 끌렸다. 그는 "과거와 현재가 나온다고 하면, 그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지 않나. 그러나 저희 드라마는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저 너머에 영향력을 끼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윤계상은 모텔 주인 '상준'을 맡았다. 상준은 비 오는 날 헤매고 있는 남성에게 쉬고 가라며 호의를 베푼다. 그러나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 남성은 연쇄살인범이었다. 모텔에서 시신을 토막 내고 사라졌다. 모텔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아무도 찾지 않는다. 생계는 무너지고, 가족은 분열됐다.
윤계상은 "연쇄살인범이 처참한 일을 저질렀지만, 누가 모텔 사장을 신경 쓰겠나. 그 신경 안 씀으로 인해 상준의 가족은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슬프다"고 말했다.
"잔잔히 상처를 받으며 무너져 내리는 역할입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처가 완벽히 치유되지 않으면, 작은 생채기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 "괴로울 정도로 몰입했다"
상준이 처한 상황은 자연재해 같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잔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연쇄작용처럼 불운을 몰고 온다. 당하기만 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건 어땠을까.
윤계상은 "오히려 당하는 게 좋았다. 상황이 펼쳐지고 리액션을 하면 됐다. 그림이 명확히 보여서 연기하기 수월했다. 상준이 사건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더 편했다"고 전했다.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기에 가능했다. 상준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장면도 많았다. 일례로, 시신이 있었던 모텔방을 때려 부수는 장면. 상준은 다치기까지 한다.
"방에 있는 것들을 막 부수다가 다쳐서 피를 흘려요. 오열하면서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박박 닦아냅니다. 대본에는 우는 것도, 바닥을 닦는 것도 없었어요. 나중에 화면을 보고 '내가 저렇게 했구나' 알았죠. 그 정도로 몰입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아들 기호의 학교에 찾아갔을 때였다. 모텔 살인 사건 때문에 왕따가 된 기호. 그러나 가해자 학부모들은 기호를 피해자로 몰아간다.
윤계상은 " 다른 학부모들이 저희 아이를 가해자라고 말하는데 심하게 몰입되더라.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실제로 배우를 때릴 뻔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물이 맺혔다"고 털어놨다.
"상준은 억울함을 겪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사실과 상관없이 '이게 진짜야'라고 몰아가는 순간, 그게 진실이 되어버리잖아요.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 3주 만에 14kg 감량까지
6회에는 세월이 지난 모습을 그린다. 20년 후 치매에 걸린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짧은 장면이지만, 지난 시간을 표현해야 했다. 윤계상은 "사건이 일어난 그때에 갇혀 야윈 모습일 것 같았다.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3주간 14kg을 감량했다"고 말했다.
"열심히 굶으면서 뺏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오히려 젊어 보인다고 하시더군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웃음) 체중 감량 외에도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목소리나 걸음걸이 등도 바꿔보려 했죠."
가장 신경 쓴 건 감정선이었다. 그는 "상준은 아내 은경(류현경 분)이 죽고 바로 무너졌을 것"이라며 "그가 20년 동안 견뎠을 어둠, 고통, 상처에 집중했다"고 전했다.
"은경이 옆에 있는 것처럼 계속 멈춰 있었을 것 같아요. 모텔을 매일매일 치우면서 팔리길 기다렸겠죠. 그런 모습을 보고 기호가 복수를 꿈꿨을 것 같고요."
김윤석(영하 역), 이정은(보민 역), 고민시(성아 역)와 함께 연기하지 않았지만, 감정선은 얽혀 있다. 특히 영하에게 비슷한 감정을 연결하는 역할이었다.
윤계상은 "상준이 최대한 슬퍼야 했다. 그래야 현재의 영하와 만났을 때 더 큰 시너지가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 장첸이 본 빌런 고민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윤계상? 시청자들에게 조금은 낯설다. 영화 '범죄도시' 장첸의 인상이 남아있기 때문. 그러나 모완일 감독은 그를 정반대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캐스팅했다.
"저도 의아해서 여쭤봤어요. '착하게 생겨서 선택했다'고 말씀해 주시던군요. 누군가가 저에게 '너는 사과야'라고 하면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내가 착한가? 착함이 도대체 뭐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드라마에는 장첸 만큼이나 무자비한 빌런이 등장한다. 바로 영하에게 찾아온 불청객 성아다. 역대급 빌런을 연기해 본 입장에서 고민시의 연기를 어떻게 봤을까.
그는 "리딩 때부터 너무 잘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사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영화 보는 내내 성아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생각하면서 봤다. 역시 고민시"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후반부에는 온 힘을 다해 연기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장첸도 그렇게 연기했거든요. 저도 기자님처럼 고민시를 인터뷰해 보고 싶네요.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빌런 연기에 대한 갈증도 다시 차올랐다. 윤계상은 "세상의 이치와 상관없이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하는 건 본능과 흡사하지 않나. 성아를 보며 다시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더라"고 말했다.
"상준처럼 끝까지 억누르고 절제하는 연기 만의 재미도 분명 있습니다. 정반대인 성아의 연기가 매력적일 때도 있고요. 장첸에 대한 부담감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자비한 빌런을 또 해보고 싶습니다."
◆ 가수 윤계상, 연기자 윤계상
국민 그룹 지오디로 데뷔했다. 돌연 팀을 탈퇴하고 연기에 도전했다.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렸다. '범죄도시'(2017년)으로 인생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연기와 가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톱 10(비영어) 4위에 올랐다. 지오디 콘서트는 매번 매진을 기록 중이다.
그러나 가수로서, 때론 배우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다. 윤계상은 "지오디와 연기할 때는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고 털어놨다.
"사실 가수는 윤상계라는 제 동생이 하는 거예요. (웃음) 그 정도로 다르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수를 할 땐 가수를, 배우를 할 땐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
곧바로 다음 달엔 콘서트를 위해 가수 자아를 켠다. 그는 "지오디가 왜 이렇게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우리도 모르겠다. 저희도 티켓을 구하기 어렵다. 내일부터 연습에 돌입한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이어 "지오디는 축복이다. 사람이 계획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고 진심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다시, 배우 자아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예비 시청자들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어렵다고 마음 접지 말라고 꼭 써주세요. 플롯이 일반 드라마답지 않아서 어려울 수 있지만, 그렇게 어려운 드라마는 아닙니다. 저도 단숨에 봤어요. 매력을 점점 느끼게 되실 겁니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