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소정기자]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더 글로리' 강현남)
염혜란은 몇 달 전만해도 다정한 여자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미래를 꿈꾼다. 모두가 그를 보며 웃고 울었다. 그리고 응원을 보냈다.
"우리 아들만 아니면 돼야 버렸어."('마스크걸' 김경자)
그러나 이번엔 모두가 치를 떤다. 살벌하다. 두 눈엔 광기가 서려 있다. 혹자는 '연기 차력쇼'라며 "제발 살살해주세요"라고 애원한다.
전작을 거짓말처럼 잊게 했다. 말투, 눈빛, 제스처는 돌변했다. 그래서 늘 새롭고 짜릿하다. '디스패치'가 배우 염혜란을 만났다.
◆ 김경자의 '복수'
'더글로리'의 강현남과 '마스크걸'의 김경자는 '복수'로 움직인다. 단, 결은 다르다. 강현남의 '복수'가 애처롭다면, 김경자는 섬뜩하다.
김경자의 삶은 박복 그 자체다. 남편의 외도, 3년 만에 이혼. 유일한 빛은 아들 '주오남'이다. 그러나 마스크걸에 의해 그 빛조차 잃는다.
핏빛 복수가 시작된다. 평범한 엄마에서 장총을 든 킬러가 된다. 염혜란은 "김경자의 복수는 직진의 통쾌함이 있다. 시원시원하다"고 표현했다.
대신 공감은 얻지 못한다. 그의 모성애는 편협하다. 광기와 집념으로 똘똘 뭉쳐 있다. 브레이크 따윈 없다.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이카루스처럼.
김경자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준 신을 꼽자면? "우리 아들만 아니면 돼야 버렸어". 토막난 시신이 아들 '주오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장면이다.
"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소중한 사람이 아닌 거예요. 내 자식만 괜찮으면 되는 사람인 거죠. 김경자를 가장 잘 설명한 대사인 것 같아요."
◆ 김경자의 '디테일'
김경자는 전남 목포 출신이다. 억센 사투리를 구사한다. 염혜란은 전남 여수가 고향이지만, 목포 지역 배우에게 사투리를 배웠다.
덕분에 김경자를 더욱 맛깔나게 살렸다. 예를 들면 이런 디테일이다.
김경자는 마트에 들어가 "(마스크걸 연락처를)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라우?"라고 묻는다. 실제로 '~라우'라는 어미는 목포에서만 쓴다.
액션마저 잘하고 싶어 킥복싱도 배웠다. "센 운동을 하니, 태도가 달라지더라. 눈을 피하지 않게 되더라. 맞는 신이어도 죽어라 아픈 건 아니겠냐면서 담대함도 생겼다"고 웃었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있었다. 물 공포증이 있는 염혜란은 수중 촬영 신을 소화해야 했다. 김경자가 탄 자동차가 저수지에 빠지는 신이었다.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공포가 연기 열정을 이기진 못했다. 프리다이빙 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m도 안되는 어린이 수영장에 계속 고개를 박으며 극복했다.
"몇 초 안되는 장면이지만 물 속에 거의 12시간 있었어요. 저의 상태를 잘 알고 계시니까 스태프들이 감동하고, 감독님도 울려고 해서 기뻤어요."
◆ 김경자의 '충돌'
"나한테 진짜 할머니는 할머니예요" "저 돈 벌어야겠어요. 할머니 여행 보내드리고 옷도 사드리고…"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김경자는 내적 갈등을 겪는다. 마스크걸의 딸 미모를 옆에 두면서부터다. 자신을 친할머니처럼 따르는 미모를 보고 흔들린다.
"감독님과 가장 의견이 달랐던 부분이었어요. 죄 하나 없는 깨끗한 영혼의 미모를 그렇게 하는 게 맞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미모가 한 말은 아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비극이었다. 염혜란은 촬영 중 계속 울컥였다. 흔들렸다. 갈등이 됐다.
"미모 앞에서도 갈등이 전혀 없었다면, 나 역시 김경자를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 같아요. 그 갈등이 제겐 너무 중요했어요."
김용훈 감독은 마지막회를 여러 버전으로 찍었다. 실제로 김 감독은 김경자의 갈등을 덜어냈다. 김경자의 눈물도 삭제했다. 복수에 집중했다.
"(내적)갈등이 센 버전과 약한 버전을 찍었어요. 최종적으론 갈등을 배제시켰죠. 모미와 끝까지 대결하는 힘을 강조했어요"
만약 미모가 손녀인 걸 알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염혜란은 김용훈 감독에게 제안했다. "손녀라는 뉘앙스를 풍기던지, 주오남과 비슷한 지점을 주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채택되지 않았다.
"극단의 상황에서 손녀라고 하면 과연 김경자가 믿었을까요? 복수를 멈췄을까요? 목숨 부지하겠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 않았을까요."
◆ 김경자의 '넥스트'
'더 글로리' 강현남, '경이로운 소문2' 추매옥, 그리고 '마스크걸' 김경자까지. 올해 화제작 중심에는 염혜란이 있다.
덕분에 '전성기' '황금기'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염혜란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화제작이 된 건, 감사하고 행복해요. 하지만 전성기라고 확언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그냥 참 좋은 시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도 부담이다. "언젠가는 실망시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은 내려놓고 싶다. 본질에 집중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염혜란은 아직 보여줄 게 많다. 그리고 길게, 오래 가고 싶다. 염혜란의 차기작은 코미디 영화 '아마존 활명수'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