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돌려 듣자마자 판단이 섰다. 2025년 케이팝 연말 결산 한 자리를 비워둬야겠다고 말이다. 지난 기고에서 남긴 제니의 '루비' 앨범에 '올해의 앨범 후보로 미리 점찍어두어도 좋다.'는 한 줄 평을 남겼는데, 벌써 두 장이 최고의 지위를 예약해 버렸다. 호들갑이 아닐까 싶어 반응을 찾아봤다. 다행히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수많은 마니아와 음악 평론가들이 소셜 미디어에 우후죽순 감상을 내놓고 있었다. 이구동성, 만장일치, 호평 일색이었다.
엔믹스(NMIXX)의 네 번째 미니 앨범 '에프이쓰리오포: 포워드(Fe3O4: FORWARD)'(이하 '포워드')에 대해 쏟아지는 간증이다. 7개월 만의 컴백이자 지난해부터 이어온 'Fe3O4' 3부작을 마무리하는 이 작품은 엔믹스가 고집스레 지켜온 철학과 타협하지 않았던 음악적 도전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완성한 걸작이다. 제목처럼 모두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던 데뷔곡 'O.O'의 약속을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켜온 엔믹스가 거침없이 전진하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았다. 아리송했던 '믹스팝'이라는 단어도, '이지 리스닝'의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던 커다란 세계관도 유기적인 결과물 앞에 납득이 간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을 향해 용감히 발을 내딛는 엔믹스다.
"갈 수 있는 가장 끝까지." 선공개 싱글 '하이 호스(High Horse)'의 가사처럼 이 앨범은 정말 끝까지 간다. 케이팝을 음악의 의미로 국한할 때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케이팝의 공식, 기승전결이 뚜렷한 댄스 팝과는 결이 다르다. '하이 호스'부터가 힙합에 재즈풍 베이스 리프와 건조한 드럼 루프, 소울풀한 보컬을 결합한 트립합 곡이다. 독특한 코드 진행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냉철하게 높은 이상을 실현하는 랩과 벅차오르는 보컬의 교차에서 그룹의 의지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차분한 타이틀곡 '노우 어바웃 미(Know About Me)'는 더 과감하다. 타이틀곡 하면 으레 생각하는 강렬한 충격 대신 단단한 내공으로 대결하는 노래다. 냉철한 트랩 비트 위 조곤조곤 의지를 담은 싱잉 랩과 보컬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과정에 심상치 않은 보컬 애드리브가 들어가고, 후반부 댄스 브레이크에서는 완전히 장르를 뒤집어 반전을 선사한다. 흔히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름길로 절대 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곡이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우리가 제일 잘하는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다짐이다.
흘려보낼 시간이 없다. 래칫 비트와 하우스를 결합한 '슬링샷(Slingshot)'이 활시위를 떠나 쏜살같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팀의 의지를 전달하고 나면, 프로듀서 뎀 조인츠(Dem Jointz)의 808 베이스 사운드가 두드러지는 힙합곡 '골든 레시피(Golden Recipe)'에서 더욱 높은 봉우리에 새겨진 엔믹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앨범의 하이라이트 '빠삐용(Pappilon)'이 이어진다. 엔믹스가 지향하는 미래주의적 세계관의 주제가를 연상케 하는 이 노래는 변칙적인 리듬 운용과 보컬 샘플 활용 가운데 고난도의 가창을 너무도 쉽게 소화하는 멤버들의 대활약과 함께 그룹 경력의 최고 곡 자리를 다툰다. 파도 소리를 표현하는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의 인디 팝 '오션(Ocean)'의 마무리까지 흠잡을 데 없는 마무리다. 다양한 장르와 최신 유행을 아울러 그룹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을 뽑아냈다. 오직 엔믹스기에 가능한 음악, 엔믹스의 최고를 경신하는 앨범이다.
사실 걸작의 탄생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케이팝 마니아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자성을 띠는 광물 자철석의 화학식을 뜻하는 'Fe3O4'로부터 시작한 3부작의 첫 앨범 '에프이쓰리오포: 브레이크(Fe3O4: BREAK)'에서 이미 확고히 정립된 엔믹스의 음악적 지향과 완성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만의 낙원 '믹스토피아'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는 적대자에 맞서기 위해, 현실 '필드'로 잠시 내려와 지지자를 모아나간다는 분명한 도전과 혁명의 주제 의식을 확립했다. 매력적인 세계관은 엔믹스의 상징이 된 믹스팝과 더불어 전 세계 트렌드를 영민하게 포착한 음악으로 완성됐다. 아래 1월에 발매했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 이 작품은 2024년 케이팝 시장이 놓친 비운의 명작이다.
힙합 기반의 장르 혼합을 자연스럽게 선보인 타이틀곡 '대시'와 '소냐르(Soñar)', 영미권 컨트리 장르 유행을 캐치한 '런 포 로지스(Run for Roses)'와 세련된 저지 클럽 '패션프루트(Passion fruit)'까지 놓칠 곡이 없었다. 단일 곡에서 복수 장르를 결합하고 변주하던 믹스팝을 앨범 전체로 확장하여 폭넓은 음악 팔레트를 만들었다. 이 흐름이 '에프이쓰리오포: 스틱 아웃(Fe3O4: STICK OUT)'까지 이어지며 '러브 미 라이크 디스(Love Me Like This)' 이후 최고의 히트곡인 '별별별'의 등장을 낳았다. 선명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엔믹스의 뛰어난 잠재력을 고려하면 창작의 전성기는 더 빨리 찾아와야 했다. 좋은 음악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팀이기에 더욱 그렇다. 펀더멘털은 가창력이다. 엔믹스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할 때도 엔믹스의 노래 실력은 모두가 알았다. 목소리만으로 멤버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개성, 훌륭한 완급조절, 랩과 보컬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범용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케이팝을 대표하는 명창 릴리 설윤 해원의 보컬 라인, 독특한 음색으로 곡에 흥미를 불어넣는 배이, 랩을 담당하지만, 보컬에도 손색이 없는 지우와 규진이 안정적인 육각형을 그린다. 무대 위 파워풀한 라이브 섬세한 감정 표현 모두 능하다. 케이팝에서 가창력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다. 반드시 노래를 잘할 필요는 없지만, 노래를 잘하면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
모멘텀도 탄탄하다. 최근 JYP엔터테인먼트는 뛰어난 라이브 퍼포먼스와 스스로 곡을 쓰고 만드는 자체 제작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가고 있다. 회사 내 본부의 창작 권한을 최대한 존중하며 옳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독려하는 자율성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프로듀싱 팀 쓰리라차가 대활약하는 스트레이키즈, 밴드 데이식스와 유망주 엑스디너리 히어로즈의 육성은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본 케이팝의 미래를 위한 투자의 결실이다. 엔믹스를 담당하는 4본부 스쿼드(SQU4D)의 뚝심도 상당하다. 그룹에 대한 비판, 스트리밍 차트에서의 저조한 성과 등 악재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엔믹스는 엔믹스만의 길을 간다. 최초의 항로에는 수많은 위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가능성이 워낙 무궁무진하기에 정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3부작 이전 엔믹스의 음악이 그룹의 잠재력을 100% 끌어내지 못한 원인이며, 음악으로 승부하는 팀이라는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예능 등으로 이미지를 소비한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케이팝 산업의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엔믹스는 이 모든 불확실성을 끌어안는다. 국내외 최고의 프로듀서들과 키드 밀리, 머드 더 스튜던트, 오메가 사피엔, pH-1 등 음악가들과의 활발한 협업을 통해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찾았다. 엔믹스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해나간다. 다른 그룹이 엔믹스의 곡을 커버할 수는 있어도, 엔믹스만큼의 퍼포먼스를 선보일지는 미지수다. 엔믹스는 그들이 정답이라고 믿는 믹스토피아를 향해 돌진한다. 구분 짓고 나누는 대신 의문이 들지라도 과감하게 섞는다. 포용을 추진체 삼아 의심 없이 돌파한다. 그렇게 종착한 '포워드'다. 엔믹스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케이팝의 한계를 시험하는 거대한 도약이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사진출처=JYP엔터테인먼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