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인 4색, 음악평론가가 바라본 블랙핑크 멤버들의 솔로 앨범
블랙핑크 멤버들의 홀로서기 첫 번째 챕터가 마무리됐다. 지난해 12월 6일 로제의 첫 정규 앨범 '로지(rosie)'를 시작으로 지수의 '아모르타지(AMORTAGE)', 리사의 '얼터 이고(Alter Ego)'와 지난 9일 제니의 '(Ruby)'까지 모든 멤버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앨범 단위의 작품을 내놓았다. 기획사도, 유통사도 모두 다른 환경에서 멤버들은 1년 6개월간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프로젝트의 결실은 지난해 중반부터 멤버들이 순차적으로 공개한 싱글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태국 전체 현지 촬영 뮤직비디오를 선보인 리사의 '록스타(Rockstar)'를 시작으로 아름다운 여성들의 LA 파티 찬가 '만트라(Mantra)'를 가져온 제니, 익숙한 술 게임 구호를 전 세계적인 히트곡으로 바꿔놓은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APT.)'가 등장했다.
선공개 곡임에도 연일 화제의 중심이었다. 막강한 블랙핑크의 브랜드 위상이었다. 영리하게도 멤버들은 이 영향력을 적극 활용하되 기존 YG엔터테인먼트의 기획 방향과 공식으로부터 탈피해 보다 세련된 미감과 주체적인 문법을 담아내며 솔로 가수로의 존재감을 각인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만들어져 각각 독특한 함의를 품고 있는 네 장의 결과물이 세상에 나왔다. 해외 레이블과 계약한 케이팝을 한국대중음악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가, 외국인 케이팝 스타의 등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케이팝에서 'K'를 떼어내려는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하는가, 세계 시장에서 케이팝 홀로서기의 모범은 무엇인가. 다양한 질문과 활발한 토론이 가능하다.
그간 블랙핑크 멤버들의 솔로 작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싱글과 앨범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데 무리가 있었던 탓이다. 제니의 '루비'가 공개된 지금이 적기다. 발매 순서대로 로제, 지수, 리사, 제니의 작품에 평가를 남겼다.
로제 '로지(rosie)'
브루노 마스에게 로제가 '아파트 게임'을 알려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채펠 론의 'Hot To Go' 흥행이 부른 'YMCA' 풍의 간결한 챈트 팝 트렌드와 생소한 한국의 놀이 문화 아이디어, '락트 아웃 오브 헤븐(Locked Out of Heaven)'을 떠올리게 하는 브루노 마스의 기타 팝이 환상의 트로이카를 이뤘다. 2024년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흥행을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아파트'는 틱톡 역대 최단기간 20억 조회수, 유튜브 뮤직비디오 인기 1위 영상, 빌보드 싱글 차트 최고 순위 3위 등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웠다. 빌보드 차트의 경우 발매 19주차를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톱 텐에 올라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는 오랜 기간 2위에 올라와 있다. 세계 시장은 물론 케이팝 여성 솔로 가수로는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한 로제의 롤 모델은 긴밀한 소통을 통해 형성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미국 Z세대와 알파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채펠 론, 할시와 같은 분노의 팝부터 테일러 스위프트가 세운 제국 아래 올리비아 로드리고, 그레이시 에이브럼스 등 음악가들이 선보이는 발라드와 포크, 신스팝을 기반에 둔다. 로제는 애플 뮤직의 팟캐스트 프로그램 '제인 로우 쇼'에서 투어 도중 전 연인과 다툰 일화를 공개하며 앨범에 20대 케이팝 스타의 삶과 일화를 담아냈음을 강조했다. 앞서 언급한 음악가들이 자주 활용하는 문법이다. 사랑의 열병, 어리석은 관계에 대한 후회와 깨달음, 그 감정을 공유하며 단단해지는 공동체의 경험이다.
'로지'는 안정적인 앨범이다. 검증된 오늘날 팝의 공식에 개인의 경험을 한 스푼 더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1989' 앨범이 떠오르는 '톡식 틸 디 엔드(Toxic Till The End)', 파워 발라드 '넘버 원 걸(number one girl)' 등의 싱글도 경쟁력이 있다. 문제는 독창성이다. 같은 문법으로 경쟁하는 작품이 너무 많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사랑의 입체적인 면모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질투하거나, 상대의 한심함을 지적하거나, 그럼에도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러브식 걸즈(Lovesick Girls)' 풍의 독특한 관점이 필요하다. 로제의 첫 솔로 작품에는 그런 특별함이 부족하다.
한 줄 평 : '아파트'만큼의 과감함이 없어 아쉬운 교과서적인 팝 앨범
지수 '아모르타주(AMORTAGE)'
'꽃'은 미묘한 곡이었다. 두 곡을 포함한 싱글 '미(Me)'는 국내 여성 가수 최초의 초동 밀리언셀링 작품 기록을 세웠다. 숏폼 플랫폼에서의 챌린지 열풍도 대단했다. 평가는 좋지 않았다. 챌린지의, 챌린지에 의한, 챌린지를 위한 노래가 쏟아지던 2023년 단연 한 곡을 꼽으라면 이 노래였다. 블랙핑크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만큼 한국, 동양의 미감을 자주 활용하던 멤버였으나 그 해석의 방식이 중독만을 염두에 둔 동요의 안이한 재해석일 줄은 몰랐다. 이 때문에 확고한 개성을 가진 타 멤버들의 활동과 비교하여 지수의 솔로 데뷔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워너 레코드와 유통 계약을 맺고 단독 레이블 블리수(Blissoo)에서 처음으로 발표하는 EP '아모르타주'는 의외의 반전을 선사한다. 우선 구성이 좋다. 네 곡만으로도 지진처럼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이 차분하게 사그라드는 서사를 유기적으로 전달한다. 곡의 만듦새도 훌륭하다. 케이팝의 매력이 대규모 프로덕션과 영미권의 팝스타들과 구분되는 통속성에 있음을 일깨우는 지수의 노래는 블랙핑크의 '마지막처럼'과 '러브식 걸즈'에 열광했던 이유를 기본에 충실한 신스팝으로 증명한다. 지진계의 진폭을 소리로 구현한 듯 날카로운 전자음과 '꽃'의 훅 리프를 결합한 '어스퀘이크(Earthquake)'와 2010년대 체인스모커스의 소프트 하우스 추억을 다시 가져온 '유어 러브(Your Love)', 케이티 페리가 투애니원을 만난 '티어스(Tears)'와 두아 리파의 '허그스 앤 키시스(Hugs & Kisses)' 모두 귀에 들어온다. 곡을 지배하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모나지 않게 곡을 소화하는 면모 역시 '기획/수행'의 케이팝 공식에 충실해서 재미있다.
케이팝은 영미권 팝의 최신 유행을 기민하게 가져와 한국의 감성으로 재가공하여 내놓는 방식으로 독특한 미학을 확보해 왔다. 무분별한 베끼기는 부끄러운 과거지만, 나름의 독창성을 확보한 작품은 기성의 팝과 다른 컬트의 묘미를 담아 많은 공감을 얻었다. 한국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따라 부르고 뛰어놀게 되는 음악의 공식, 말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을 것이다. YG엔터테인먼트는 지난 케이팝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음악을 가장 잘 만들었던 기획사다. '아모르타주'는 그 케이팝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케이팝에서 'K'를 떼고자 하는 오늘날, 케이팝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은 이유를 역으로 곱씹어보게 하는 앨범이다.
한 줄 평 : 심오한 철학과 무거운 의미 없어도 즐겁다. 오랜만에 듣는 '케이팝'
리사 '얼터 이고(Alter Ego)'
'록스타'는 세상을 뒤집어버릴 듯한 작품이었다. 히트메이커 라이언 테더가 참여한 하이퍼 팝 위에서 새로 태어난 리사는 방콕 차이나타운 야와랏을 통째로 빌려 촬영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초국적 케이팝 스타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 태국의 밤거리를 그대로 담아낸 풍경, 트랜스젠더 댄서들의 출연, 4년 전 첫 솔로 싱글 '라리사(LALISA)'에 쏟아진 태국,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 전체의 폭발적인 반응과 그대로 연결된다.
'리사, 내게 일본어를 가르쳐줄래? 나는 하이(Hi / はい / ให้ )라고 대답하지'라는 노랫말로부터 우리는 리사를 둘러싼 복잡한 담론을 읽어낼 수 있다. 비한국인 케이팝 스타는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를 아우르는 다재다능함으로 모국을 대표함과 동시에 영미권 팝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풍경은 리사가 최초다. 오래도록 케이팝과 한류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2020년대 경제 성장과 문화적 영향력 증대, 이를 바탕으로 자국 문화를 강조하며 케이팝과는 다른 무언가를 강조하고자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케이팝 시스템이 육성한 팝스타들의 날갯짓이 어떤 나비효과를 몰고 올지 궁금해진다.
문제는 앨범이다. 존재 자체로 흥미로운 선공개 곡에 비해 독립 레이블 라우드(LLOUD)와 RCA 레코드의 지원을 받아 발표한 첫 정규작 '얼터 이고'는 평범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케이팝이 '케이'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범하는 오류와 같다. 록시, 키키, 써니, 스피디, 빅시라는 다중인격 콘셉트를 통해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확장성을 공표하지만, 다양한 자아를 각인하기에 지나치게 안정적인 프로덕션은 기성 팝 이상의 감흥을 안기지 못한다. '록스타'의 정체성을 앨범 전체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곡을 온전히 장악하는 능력에도 부족함이 있다. 스페인 출신의 슈퍼스타 로살리아와 함께한 '뉴 워먼(New Woman)'에서는 모국어를 사용하며 주도권을 휘어잡는 로살리아에게 밀리고, 도자 캣과 레이의 참여로 화제를 모은 '본 어게인(Born Again)'은 피처링처럼 들린다. 식스펜스 넌 더 리처의 '키스 미(Kiss Me)'를 샘플링한 '문릿 플로어(Moonlit Floor)'는 더욱 앨범을 난해하게 만든다. '록스타' 뮤직비디오의 표절 의혹과 립싱크 논란도 치명적이다.
한 줄 평 : 의미 있는 담론을 던졌지만, 케이팝의 오류까지 답습해 버렸다.
제니 '루비(Ruby)'
음악가 정재형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에 출연한 제니는 블랙핑크로부터 솔로 데뷔를 준비하던 지난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타인의 시선 대신 자신을 탐구하고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노라 고백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가다듬었다. 케이팝 솔로 프로젝트의 아쉬움은 충만한 재능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내고자 하는 개인의 의도가 기획이 기존 소속사의 기성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발생한다. 제니는 오래 걸리더라도 기본부터 다져가는 쪽을 택했다. 탐구와 고민 끝에 중심이 잡혔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등장하는 저명한 구절,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이다'를 앨범 콘셉트로 결정했다. 기둥이 되는 곡 '젠(ZEN)'이 나왔다. 제니의 세계다.
오래 깎고 다듬어 섬세하게 세공한 '루비'는 선명한 제니의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작품이다. 선홍빛 청사진이라 불러도 되겠다.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고, 원하는 대로 만든 작품에서 음악가는 당당한 이름 부르기 '라이크 제니(Like Jennie)'부터 글로벌 대중음악 시장을 선도하는 음악가들과의 협업, 톱스타의 연약한 내면을 고백하는 후반부까지 주인공의 통제권을 잃지 않는다. 가장 뜨거운 신예 도치(Doechii)와 함께한 '엑스트라라지(ExtraL)'에서는 비욘세의 대규모 군무를 통한 여성주의 선언을 가져오고, 두아 리파와의 '핸들바스(Handlebars)'에서는 모호하고도 매력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힘겨운 케이팝 연습생 시절의 삶과 데뷔 후 숨 가빴던 지난날의 고충을 담고 있는 '스타라이트(Starlight)'와 멀어진 친구에게 보내는 눈물의 편지 '트윈(twin)'의 감정은 깊다.
'젠'의 뮤직비디오는 정점이다. 불교TV 채널에서 문광스님이 영상을 보며 감탄했듯, 제니가 탐구한 불교적 요소와 역사적 배경으로 정교하게 새겨넣은 비주얼 자개 공예품이다. '세상을 움직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겠다'라는 포부를 담고 있는 앨범의 핵심 곡에서 제니는 세상의 중심이 나라고 당당히 외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주체적이고도 굳건한 현대의 여성상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케이팝 그룹의 솔로 데뷔작 가운데 가장 훌륭한 완성도의 앨범이다. '케이'팝도, 케이'팝'도, 우뚝 서 있는 개인 앞에서는 무의미한 구분 짓기다.
한 줄 평 : 올해의 앨범 후보로 미리 점찍어두어도 좋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사진출처=디스패치DB, 더블랙레이블,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블리수, OA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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