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와! 이거 진짜 어렵겠다."
'검은 수녀들'의 대본은 녹록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오컬트 영화는 처음이다. 장르물에 끌려 선택했지만, 초반에는 물음표 투성이였다.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나 28년의 연기 내공은 녹슬지 않았다. '더 글로리'의 다크혜교에, 성수를 (기름통에 담아) 뿌린 느낌.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용감하고 고결한 수녀로 변신했다.
"이전에는 마음에 감춰두는 연기를 많이 했었죠. 내가 (장르물을) 잘 할 수 있을까 했죠. 한데 시작하니 재밌고, 신나더라고요. 오랜만에 사이다를 시원하게 마신 느낌이었습니다."
첫 복수극(더 글로리)에 이어, 첫 오컬트의 맛을 봤다. 28년간 배우의 길을 걸었지만, 이런 짜릿함은 오랜만이었다. 바로, 송혜교가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송혜교가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검은 수녀들' 라운드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근두근 내 인생'(2014년) 이후 11년 만에 여러 취재진과 만나,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했다.
◆ "왜, 검은 수녀들이었을까"
송혜교 배우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꼽자면, '더 글로리' 아닐까. 그만큼 문동은의 포스는 강력했다. 버석하고 거친 얼굴, 고독한 무표정, 냉혹한 복수…. 멜로의 컬러를 지우기 충분했다.
복귀작인 '검은 수녀들'은 (제목처럼) 더 짙다. 특히, 유니아는 신념 하나만으로 모든 걸 극복하는 캐릭터다. 두려움, 망설임, 심지어 육체적 고통까지 이겨낸다.
그 선택에 대해 묻자, 송혜교는 "더 글로리를 마치고, (너무 빨리) 사랑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장르물 위주로 시선이 갔고, '검은 수녀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사실 전 실화를 좋아해요. SF 적이고 후반 작업이 많이 필요한 작품에 흥미를 잘 못 느끼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날, '검은 수녀들' 대본을 읽는데 상상이 되더라고요. 재밌었어요."
스스로, 수녀복을 입은 자신을 생각했다. "내가 만약 구마를 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밝혔다. 천천히, '검은 수녀'가 된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시켰다.
뻔하지 않은 오컬트라는 점에도 이끌렸다. 구마가 아닌, 구출이 중심이라는 것. 유니아와 미카엘라(전여빈 분), 두 수녀가 주축이 된다는 부분도 매력적이었다.
"오컬트지만, 드라마적 요소가 더 강하게 다가왔어요. 신념이 강한 두 여성의 연대도 좋았습니다. 해본 적 없는 구마신에 이끌렸고, 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 "유니아, 평범한 수녀가 아니다"
유니아는 통념을 깬 수녀다. 시니컬한 무표정으로 담배를 피운다. 욕설하고, 냉소한다. (실은, 그녀의 진면모는 고결한 희생이다. 가엾은 아이를 구하려 자신의 모든 걸 던진다.)
오프닝, 송혜교의 흡연 신이 강렬하다. 그는 "흡연하는 신이 있길래 조금 고민했다. 비흡연자인데, 빼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흡연 신이 빠지면, 유니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아쉬움이 많더라고요. 유니아는 우리가 늘 봐왔던 수녀님과는 다르니까요. 자유로운 영혼이고, 교단에서 하지 말라는 행동만 하는 수녀죠."
송혜교는 "유니아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치가 담배 피우는 부분이라 생각했다"며 "첫 신부터 담배인데, 그걸 가짜로 하면 유니아의 모든 게 가짜가 돼 버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작품에 임하기 6개월 전부터 담배를 배웠다. "흡연자들은 진짜 구분이 가능하다고 들었다"며 "영화 찍는 동안 피웠고, 지금은 끊었다"고 미소지었다.
메이크업도 최소화했다. 그의 전투복은 투박한 검정색. "어떤 배우들은 촬영 전 '나'로 갔다가, 분장하면 그 캐릭터로 바뀐다고 하지 않나. 저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검은 수녀복을 입고, 베일을 쓰는 순간 신기하게도 (유니아로) 몰입할 수 있었어요. 의상과 설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 "나는, 유니아처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유니아라는 인물을 이해해야 했다. 유니아는 청각장애가 있고, 악령의 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자다.
송혜교는 "유니아는 일찍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걸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며 "그렇기에 단단한 삶을 산다. 웬만한 것에 흔들리지도 않고,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악령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유니아는 초반부터 악령에 대해 덤덤하다"며 "유니아가 (감정적으로) 흔들린다면, 매력이 없었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유니아의 컬러가 무채색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흥미로운 건, 유니아로 살며 겪은 송혜교의 감정 변화다. 내면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유니아 그 자체가 됐다. 자기 희생에 대한 생각까지 바뀌었다. "나라면 못해"에서, "나라도 그랬을거야"로.
"나라면 유니아처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계속 던졌었어요. 처음엔,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유니아로 몇 달 살다 보니, 저 자신은 사라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그 마음이 되더군요."
유니아의 숭고한 선택에도,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불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저도 그 신을 찍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현장에선 모두가 몰입했고, 저절로 연기가 됐었다"고 떠올렸다.
"(후반부 촬영시) 너무 슬펐어요. 여빈 씨도 감정이 올라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했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울었죠. 저, 미카엘라, 희준이 모두 오로지 '검은 수녀들'에 빠져 살았던 것 같아요."
◆ "배우 송혜교, 사람 송혜교"
이날 인터뷰는, 모두에게 특별한 자리였다. 송혜교의 라운드 인터뷰는 무려 11년 만이다. 송혜교를 처음 보는 기자들도 많았다. 자연히, 송혜교의 심경 변화에 관한 질문도 쏟아졌다.
송혜교는 "과거엔 '내가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실수하지 않을까? 겁이 많았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며 "일부러 신비주의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고 답했다.
"어렸을 땐 많은 분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마냥 겁나고 긴장됐었어요. 지금은 저도 나이를 먹었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편안해졌어요. 오늘 기자 분들과도 수다떨듯 인터뷰를 했어요. 재밌어요."
성숙해진 내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저는 원래 항상 주변 사람, 남의 시선, 가족 등을 늘 신경쓰며 살았다. 온전히 절 처음으로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고 회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보자'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뭔가가 크게 바뀌지 않더라도, 더 행복해졌죠.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랑을 주게 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23년 만의 TV 예능 출연( 유 퀴즈 온 더 블록) 역시, 같은 맥락의 선택이다. 여러 웹예능으로도 대중을 만났다. 특유의 소탈하면서도 위트 있는 화법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송혜교는 "처음엔 당연히 작품 홍보 목적이었다. 내게 관심이 있으실까 하는 걱정도 했다"며 "그런데 어르신들도 좋아해주시고, 젊은 친구들도 좋게 봐 줬다. '검은 수녀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다"고 웃었다.
◆ "계속 도전하고 싶다"
28년, 송혜교가 배우로 살아온 시간이다. 일찍 데뷔했고, 빠르게 성공했다. 많은 일을 겪었기에 성장했고, 여유롭고 단단했다. 톱스타이자 톱배우, 송혜교의 오늘이다.
"과거 안티가 많았다고요? 어머, 지금도 많을 걸요. (댓글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요."
인기에는 물처럼 덤덤하지만, 연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 신인 같은 열정이 살아 있었다. 그는 "매번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연기가 너무 어렵다"고 고백했다.
"어렸을 땐 막연히, 30, 40대가 되면 연기를 가지고 놀겠거니 생각했어요. 이제 그 나이가 됐는데도 어려워요. 생각해보니 제가 맡는 캐릭터도 나이를 먹더군요. 그 캐릭터의 삶은 또 처음인 거죠."
송혜교는 "아직도 공부해야 할 게 많다. 연습해야 하고, 연구해야 한다"며 "앞으로도 (연기는) 그렇게 쭉 어려울 것 같다"고 예상했다.
유니아는 극중 "기도의 핵심은 진심"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송혜교의 연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송혜교는 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실"이라고 답변했다.
"어떤 연기든, 제 마음 속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잘 표현되지 않아요. 우는 신도, 괴로워하는 신도…. 거짓으로 흉내내면 항상 들통나더라고요. 제 연기의 핵심은, 그래서 '진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송혜교는, 여전히 내일이 기대되는 배우다.
"장르물로 사랑받았다고 해서, '장르를 계속 해야겠다'하는 부담감은 없습니다. 장르에 재미를 느끼지만, 다른 쪽으로 갈 수도 있죠. 코미디도 또 해보고 싶어요. 실패할지언정, (물론 그래선 안 되겠지만) 계속 도전하고 싶습니다."
<사진제공=U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