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무릎 위로 올라가 있던 스타킹은 정강이까지 내려갔다. 모든 것을 다 소진할 정도로 쏟아부어 연기했다.
공들인 메이크업, 반짝이는 의상, 예쁜 표정은 없었다. 어눌한 말투, 불안정해 보이는 자세와 표정.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 빛이 났다.
김세정이 연극에 도전했다. '템플'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딛고 동물학자로 성장한 '템플 그랜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템플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고등학교에서 칼락 선생님을 만나 문을 열고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세정도 '템플'에 다가가기 위해 문을 열어야 했다. 다음은, 세정이 문을 연 '템플'의 세상이다.
◆ 템플 | 기적 같은 아이
1940년대. 자폐는 냉담한 부모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원인이라 여겨지던 때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난관이었다.
왜 신체접촉을 고통스러워하는지, 왜 갑작스레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사람들도, 템플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템플은 엄마의 헌신과 칼록 선생님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깨닫게 된다. 혼자가 아님을 알고, 한발 한발 성장한다.
신체연극으로 구현했다. 사춘기의 예민한 감정은, 붉은 리본으로 몸을 결박해 묘사했다. 템플이 자신을 깨달았을 땐, 그의 몸을 높이 들어 올려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배우들이 직접 무대 위의 소품으로 변신하며 입체적으로 극을 완성했다. 쉼 없이 움직이며 무대라는 한정적인 공간을 다양하게 변신시켰다.
덕분에 템플을 향한 오해와 편견이 마냥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할 땐, 배우들의 깊이 있는 감정 연기로 무게를 실었다.
◆ 세정 | "왜요?"
세정은 어땠을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실제 모델이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대사량도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가수로서) 월드투어를 돌 때였다.
먼저 대본과 메모장에 빼곡히 질문을 던졌다. 포근함이란 뭘까. 넘어야 하는 문이란 뭘까. 내가 전하고자 하는 건 뭘까. 내가 끊임없이 묻는 것은, 무엇일까.
더블 캐스팅된 선배의 연기를 보며 느낀 감정들을 망설임 없이 적어나갔다.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대본에 가장 큰 글자로 적힌 "왜요?". 그 물음표가 모여 '템플'을 완성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그리는 버릇, 불안정한 손과 발, 컨트롤되지 않는 움직임.
또래와 사고하는 방식이 달라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일례로 템플은 남자의 생식기에 호기심을 갖고, 특정 단어에 집중한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연기하지 않았다.
'인지하는 방식이 너무 성숙하지 말자 (나이를 상황을 고려하기)'. 대본에 써놓은 메모처럼 아이처럼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졌다.
핀조명이 자신을 비추지 않는 순간에도, 세정은 템플이었다. 탄탄한 발성, 확신에 찬 연기, 95분간 팽팽한 집중력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 세정의 문
무대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다. 공연 말미, 템플은 그 문을 넘고 자신을 마주한다. 나를 만나는 창구. 세정은 그 '문'에 매료됐다.
잠깐, 세정의 해석을 들어보자.
"템플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감정이 몰려올 때면 나만의 내적 세계로 도망쳤다. 내적 세계는 하나의 도피처이자 미지의 세계 같은 존재였을 거라 생각한다.
템플은 어느 날 목사님의 말을 듣고 내적 세계와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늘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다고 느꼈던 템플. '문'은 처음으로 누군가와 연결될 것만 같은 막연한 힘을 준 단어였다."
"난 이 문을 넘고 나서야 내 문제가 보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꿈꾸게 되었어요." (템플)
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 세정은 템플을 만났다. 그 인물을 연구하고, 무대에 올라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템플은, 새로운 도전을 향한 문이었다.
'이 문을 발견할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는가. 아마추어라는 숨구멍이 날 두근거리게 한다.' (세정의 메모장 中)
아이돌, 솔로 가수, 작사·작곡, 연기, 뮤지컬. 늘 안주하지 않고 도전했다. 누가봐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을 때, 세정은 다시 아마추어의 길을 선택했다.
연극 무대 위에선 이전의 필모는 생각나지 않았다. 연기에 열정 가득한 세정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성장은 아직 진행형이다.
한편 '템플'은 다음 달 18일까지 서울 대학로 서경대 공연예술센터 스콘1관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사진출처=공연배달서비스 간다, 김세정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