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脫K팝 시대를 살아간 K팝 그룹들 (결산)
2023년의 케이팝은 상업적 전성기였다. 1월부터 10월까지 케이팝 음반 누적 수출액만 3,000억 원을 돌파했다. 미국 빌보드,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 수많은 케이팝 그룹의 이름을 볼 수 있었고, 유명 페스티벌 무대를 장식하는 등 장밋빛 성과가 쏟아졌다. 동시에 불길한 그림자도 드리웠다. 연초를 뒤집어놓은 혼란의 SM 인수전,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주창한 '케이팝 위기설'은 2023년 내내 위기감을 조성했다.
케이팝은 영미권 팝 그 자체가 되고자 했다. 현 산업 정점에 있는 기획사 하이브는 '케이(K)'를 떼고 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을 강력히 관철시켰다. 위켄드의 신스웨이브를 꿈꾼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체이싱 더 필링(Chasing The Feeling)', 마이클 잭슨의 춤과 뮤직비디오 그리고 음악까지 오마주한 엔하이픈의 '스윗 베놈(Sweet Venom)'과 더불어 2000년대 솔로 팝스타 페르소나에 도전하며 마침내 그 시대의 증인 저스틴 팀버레이크와의 콜라보까지 이뤄낸 정국이 대표적이다. 하이브는 유니버설 게펜과 손을 잡고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 '더 데뷔: 드림 아카데미'를 개최하여 미국 현지화 그룹 캣츠아이(KATSEYE)를 결성하며 케이(K)의 제작 시스템을 이식하되 케이의 국적성을 유연하게 다듬기도 했다. 하이브와 더불어 미국 시장에서의 케이팝 현지화 정책에 힘을 실은 기획사는 JYP였다. '에이투케이(A2K)' 오디션 진행과 더불어 빌보드 200 차트에서 성과를 낸 스트레이키즈, 거대한 규모의 북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트와이스를 필두로 맹렬히 케이팝의 영미권 팝 대체를 향해 달려갔다.
'더 넓은 시장에서 더 넓은 소비자층을 만나야 한다' 두 기획사의 케이팝 경영 철학은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 해를 돌아봤을 때 그 전략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스트리밍 음악 감상의 정착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영미권 주류 음악의 약화, 숏 폼 플랫폼의 강세로 전 지구를 아우르는 고전적 대중성의 시대가 지났다. 컨트리, 멕시코 음악, 라틴 팝, 힙합 등 각 집단을 강력하게 대표할 수 있는 지역 및 팬덤 기반의 아티스트들이 정상을 거머쥐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오랫동안 쌓아온 음악과 팬덤 결속 전략을 병행하며 기성 팝 산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궤도에 올라탔다. 역설적으로 2010년대 이를 예견하며 세계 시장으로 진입한 케이팝이 저물어가는 영미권 팝의 대체제를 자처하며 흥미를 잃고 있다.
케이팝의 '케이'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한국인, 한국어, 한국 사회 등 국적과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케이, 연습생을 선발하여 훈련하고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영미권 대중음악을 레퍼런스 삼아 노래와 퍼포먼스를 조합하여 내놓는 시스템으로 케이, 헌신적인 팬을 모아 조직적인 소비 행동을 유도하는 산업으로 케이 등이다. 케이팝에서 케이를 떼려고 하는 이들이 간과한 점은 두 가지다. 판타지와 성장 만화, 신화 등 다양한 이야기로부터 각 그룹의 세계관을 구축한 것은 좋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케이팝을 성공으로 이끈 독특한 제작 구조와 정서의 케이를 제거하는 결정은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던 대안의 지위를 상당수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철학이 흔들리니 그 결과물도 위탁 생산물 이상으로 호평하기 어려운 결과만이 등장했다. 더는 케이팝을 팝의 대안으로 주목하며 들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행히 올 한 해 케이팝이 모두 하이브와 JYP처럼 '영미권 팝'을 향해 달려간 것은 아니었다. 큰 노선을 따라가면서도 나름의 개성을 더해 훨씬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은 경우 역시 많았다.
이를 배경으로 올해 인상적이었던 케이팝 작품을 뽑아 보겠다. 걸그룹 하이키의 올해 활동은 훌륭했다. 데이식스의 서사를 쌓아 올린 영케이와 홍지상이 선사한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그리고 '서울'은 케이팝의 비인도적인 제작 공정과 정글 같은 활동 과정,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핵심 정서를 정확히 관통했다. 해외 작곡가들의 스케치 데모를 골라 현지화하여 내놓는 보편적 방식을 배제하고 작곡가-그룹의 구조를 고수한 성과였다. 역주행의 감격을 누린 팀은 물론 듣는 우리에게도 남다른 감동을 안겼다. 제대 후 영케이가 내놓은 솔로 앨범 '레터스 위드 노츠(Letters with notes)'도 훌륭한 솔로 로커의 데뷔 정규작으로 추천한다.
케이의 기본에는 피로가 있다. 연습, 과로, 야근, 가식과 가십, 바이럴, 악성 댓글. 매일 환한 미소로 대중 앞에 서지만 짙은 회의감의 그림자를 이겨내야 하는 고충이 깊다. 이는 케이팝을 낳은, 무한 경쟁과 빨리빨리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 현실에 공감하는 노래들이 '탈 케이' 시대에 더욱 와닿았다. 리더 전소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여자)아이들의 외모지상주의와 소셜 미디어 비판 곡 '알러지(Allergy)', 이 지독한 감정을 직장인의 고충에 대입한 세븐틴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와 그룹 단위에서 "이런 빌어먹을 세상"을 외친 세븐틴의 '퍽 마이 라이프(F*ck My Life)', 훌륭한 송라이터로 거듭나는 우즈 조승연의 '어비스(Abyss)'가 기억에 남는다.
걸그룹 있지의 '킬 마이 다우트(Kill My Doubt)' 앨범은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제목 아래 자기혐오와 냉소를 고백하는 노래가 이어지는데, 타이틀곡은 그럼에도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무대 위 완벽한 모습을 위해 나아가는 '케이크(Cake)'다. 재미있게도 진솔한 고백을 담은 이 앨범 크레딧에 멤버들의 이름이 전혀 없다. 그래서 완벽한 케이팝 앨범이다. 모순과 상처를 안고 빛나는 무대에 청춘을 모조리 투자하며 환호를 받는 기획과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멤버들, 그야말로 케이팝이다.
아이브의 '아이브 마인(I'VE MINE)'은 그 재미를 한층 더 날 선 언어로 가공한다. 트렌드 최전선에서 나르시시즘으로 중무장한 그룹이 '가끔은 왠지 금지된 게 궁금하거든('Off the Record')'이라 앨범을 시작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그중 선우정아가 가사를 맡은 '이더 웨이(Either Way)'는 정말 최고다. "쟤 I라서 그래 넌 E라서 그래 됐고 그냥 V나 하자" 노랫말은 오직 MBTI 지옥 대한민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최고의 Z세대 위로곡이다.
동시에 아이브는 다른 의미에서 '이것이 케이팝이다!'를 외쳤는데 그 노래가 장엄한 행진곡 '아이엠(I AM)'이다.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뮤직비디오, 당당한 태도와 그를 보좌하는 초고음 열창 및 비주얼 공격, 군가를 방불케 하는 비장함은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로의 케이팝을 증명했다. 보이그룹 측에서는 스트레이키즈가 활약했다. 지난 연재 '스트레이 키즈, 진짜 즐길 줄 아는 락스타'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케이팝을 즐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는 블록버스터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시각적 장치와 비주얼, 그리고 무대라는 불구덩이에 기꺼이 투신하는 열정이 있다. '락스타(樂-STAR)' 앨범과 '메가버스(Megaverse)'는 그 꼭대기를 장식한 작품이었다. 몬스타엑스의 '리즌(Reason)' 앨범과 에이티즈의 '바운시(Bouncy)', 세븐틴의 '손오공'도 역동성과 박진감으로 정상을 다툰 곡으로 인상적이었다.
모드하우스의 트리플에스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했다. 이달의 소녀 기획을 연장하고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탑재한 이들은 유닛 구성을 바탕으로 엔시티(NCT)가 포기한 무한 확장을 실현하기 위해 맹렬히 달려 나갔다. 그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단연 '라이징(Rising)'이다. 검정 패딩을 입고 한 마음 한뜻으로 반지하 연습실로 향해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소녀들의 모습, 완벽한 '케이팝 희망 편'의 환상이다. 빛나는 무대 위 감각적인 케이팝 식 연출이 평범해보일 정도다. 장기적 기획보다 일회성 소모에 가까웠지만, 강력한 최면술을 부렸다.
웰메이드 팝으로 넘어가자. 피프티피프티의 '큐피트(Cupid)'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을 거두며 케이팝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곡 중 하나가 되었다. 2010년대 말 디스코 리바이벌과 숏 폼 플랫폼 바이럴 레시피를 충실히 따르며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이 노래는 그 순진함과 무해함으로 2023년 틱톡에서 가장 주목받은 곡에 등극했다. 틱톡이 유독 힘을 쓰지 못하는 한국에서 대중음악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틱톡의 위력을 알린 사례였다. 이처럼 성공 비결은 단순했는데, 여러 의미를 더하다 보니 욕심과 오해가 겹치며 지난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룹과 관련된 모두가 웃지 못했다. 케이팝다운 결말이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일렉트로팝 추천작으로는 스테이씨의 '파피(Poppy)', 트라이비의 '스테이 투게더(Stay Together)'를 추천한다. 빌리의 '더 빌리지 오브 퍼셉션 : 챕터 쓰리(the Billage of perception : chapter three)'는 그룹의 미스테리한 정체성을 멋지게 구현한 수작이다. 타이틀곡 '유노이아(Eunoia)'와 더불어 앨범 단위 감상을 적극 권장한다. 더불어 2000년대의 유행 테크토닉을 세련된 딥 하우스로 차용한 전소미의 '패스트 포워드(Fast Forward)'는 익숙하되 낡지 않아서 재미있었다.
'웰메이드', '실력파'라는 수식이 가장 많이 붙었던 팀으로 키스 오브 라이프가 있다. 사실 곡만 놓고 보면 뚜렷하게 두드러지는 지점은 없다. 2010년대 데뷔한 영미권 걸그룹들의 잔향이 짙은 가운데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90년대 티엘씨(TLC), 엔보그, 데스티니스 차일드 등의 목표가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네 멤버들이 뛰어난 보컬 합과 퍼포먼스를 통해 간결한 음악에 힘을 불어넣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케이팝 초창기 기획자들이 영미권 알앤비 걸그룹을 목표로 삼고 달려 나갔음을 기억하면, 피프스 하모니와 리틀 믹스를 겨냥하는 키스 오브 라이프도 고전적인 접근 방식으로 케이를 떼어네고자 하는 모범 사례로 선정할 수 있다. 이들은 국내 소규모 기획사도 영미권 걸그룹 수요를 맞출 정도의 프로듀싱 역량을 갖출 정도로 상향 평준화된 케이팝 시장의 증거다. 멤버들의 호흡이 아름다운 '본 투 비 엑스 엑스(Born to be XX)' 앨범을 추천한다.
끝없이 대중과의 접점을 요구받던 보이그룹 진영에서도 답을 내놓기 위해 고심했다. 그 중 엔시티 127(NCT 127)의 '디제이(DJ)'와 라이즈(Riize)의 '겟 어 기타(Get a Guitar)'를 내놓은 SM엔터테인먼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난해한 메시지와 나무 심기에 당황하던 가운데 허비 행콕의 터치를 훌륭히 모사한 '디제이'는 감탄이 나오는 곡이었다. 제목과 콘셉트, 악기 소리를 통일하여 수더분한 소년들의 데뷔곡으로 삼은 '겟 어 기타'는 독특한 아이디어와 간결한 구성이 빛났다. 격동의 SM은 올해 팀마다 들쭉날쭉한 완성도로 덜컹거렸다. 하지만 역량은 건재했고, 그룹의 미래까지 허투루 준비하지는 않았다.
결산의 끝은 돌고 돌아 뉴진스다.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조건에 뉴진스가 빠지는 부분이 없다. 어도어 레이블과 민희진 대표, 음악을 담당하는 레이블 바나(BANA) 팀은 SM엔터테인먼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중앙집권 구조로 단단히 엮여 티끌 하나 없는 뉴진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데 팔을 걷어붙인다. 대중음악의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한 제작자들은 팬데믹 시기 영미권의 1인 베드룸 음악가들이 주목한 드럼 앤 베이스와 저지 클럽 장르를 '슈퍼 샤이(Super Shy)'와 '디토 (Ditto)'의 달콤한 케이팝으로 대중화하여 보급하는 데 성공했다.
뉴진스의 궁극적인 이상향도 영미권의 서구 팝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촬영한 감각적인 뮤직비디오와 '영미권 유학생 감성'은 분명 한국의 것이 아니며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백인 사회를 향한 강한 동경의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혜진이가 엄청 혼났던 그날 / 지원이가 여친이랑 헤어진 그날" ('ETA') 등의 가사는 뉴진스에 알록달록 케이 정체성 스티커를 부착하여 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렴 어떠랴. 다사다난한 2023년에 지쳐 있던 세계 음악 팬들은 플래시몹을 연상케 하는 '슈퍼 샤이'의 대규모 군무와 활발하게 업로드되는 소셜 미디어 콘텐츠에 넋을 잃고 뉴진스 행 환상특급 열차표를 끊었다. 적어도 뉴진스라는 무균실에서는 근심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사진출처=각 소속사, tvN, 롤라팔루자, 디스패치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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