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세자야. 잠깐 얘기 좀 할까?" (남궁민)
MBC-TV '연인' 촬영장. 김성용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 남궁민이 다가왔다. 혹시 뭔가 잘못했나? 당황해 얼어붙은 순간, 따스한 조언이 돌아왔다.
"소현아. 난 네가 세자라는 지위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남궁민)
순간, 부끄러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이 왔다. '아, 나 조선의 세자인데. 대사가 아니어도, 행동 하나 하나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때부터 한 치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간 100을 공부했다면, 이제 200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짓 하나, 손 동작 하나, 표정 하나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디스패치'가 최근 배우 김무준을 만났다. 그는 이제 고작 2개의 드라마를 마치고, 3번째 작품을 연기하는 신인이다. 첫 사극에, 그것도 소현세자라는 실존 인물로 변신했다.
다음은, 김무준의 '연인' 도전기다.
◆ "기회는, 준비된 사람의 몫"
소현세자. 누구나 아는 비운의 인물이다. 병자호란으로 한 순간에 세자에서 포로 신분이 된다. 귀국 후에는 인조의 미움을 사,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사랑하는 아내며 자녀들까지 모조리 도륙당했다.
역할은 오디션을 통해 따냈다. "소현세자 역 대본을 보고,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용 감독님 앞에서 떨기는 했지만 열심히 연기했다. 합격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고 회상했다.
역할 확정 이후, 첫 촬영 전까지 의욕을 불태웠다. 우선, 단 2~3달 안에 14kg을 감량했다. 하루에 닭가슴살 한 팩만 먹었다. 헬스장에 출근 도장도 찍었다.
그는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가 치욕을 겪는 인물이다. 통통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고 병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기 뿐만 아니라 비주얼도 완벽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밝혔다.
"사실, 남궁민 선배님한테 자극도 받았어요. 선배님께서 '검은 태양' 하실 때, 하루 5~8끼를 토할 정도로 먹으며 증량하셨어요. 그 다음 '천원짜리 변호사'에선 완전히 감량하셨죠. 작품을 위해서요."
김무준은 역사의 무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실존 인물이다. 가상 캐릭터처럼 자유롭지 않다. 배경 지식을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 공부를 다시 했어요. 서점 가서 책을 보고, 인터넷으로도 찾아봤죠. 소현세자와 병자호란이라는 시대를 공부했습니다. 그 배경을 두고 소현세자의 입장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 "김무준을 버리고, 소현세자가 되는 법"
분명, 완벽까진 아니어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사극 톤을 연습하고, 소현세자에 깊이 몰입했다. 세자의 위엄을 몸에 장착한 것. 디테일하게는 입술 혈색을 죽이고, 거친 피부도 연출했다.
그러나 첫 촬영에 돌입한 순간, 한 마디로 '멘붕'이 찾아왔다.
"촬영 전에는 대본을 보며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민을 하되, 안주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촬영을 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반성했습니다."
김무준은 "제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너무 방심했다"며 "내가 이렇게 하면 작품에 민폐가 될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문제점을 느꼈을까? 김무준은 이 질문에, "소현세자를 연기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김무준이라는 사람이 나오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궁민 선배님이 세자라는 지위를 자각시켜 주셨다"며 "손짓 하나, 서 있는 자세의 어깨, 걸음걸이, 턱의 방향 등 하나 하나 놓치고 있었던 게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세자라면, 앉아 있을 때도 김무준처럼 편하게 앉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쫙 폈겠죠. 굳이 대사로 설득할 필요도 없어요. 손으로 (상을) 탁 내리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거에요. 연기할 때 그 점을 잊지 않고 대입하려 했습니다."
◆ "치열함의 결과, 김무준만의 소현세자"
소현세자라는 인물을 두고 수없이 고민했다. 촬영장의 선배들에게 귀중한 피드백도 받았다. 덕분에 캐릭터를 제 옷처럼 입을 수 있었다. 남궁민에게서는 칭찬까지 얻어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나라는 인물의 모습들을 지우는 과정이었다"며 "그러다보니 새롭게 나타나는 (소현세자만의) 습관들이 있었다. 달라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재밌었다"고 전했다.
"남궁민 선배님이 한 번씩 제 촬영을 보시곤, 뒤에서 몰래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시곤 하셨어요. 선배님께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하고 기뻤습니다."
김종태(인조 역)와의 티키타카도 소중했다. 극중 인조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큰 충격을 받는다. 아들에 대한 감정도 극단으로 치닫는다. 김무준과는 섬세한 감정 연기를 나눈다.
김무준은 "제가 김종태 선배님을 수발 들기 위해 세워드리는 신이 있었다"며 "제 오른손을 들지 왼손을 들지, 서로 손을 계속 바꿔 잡으며 연습했다. 함께 신을 만들어나갔다"고 예를 들었다.
"김종태 선배님은 제 연기를 최대한 편안하게 끌어내주셨어요. 눈을 마주칠지 내리깔지도 제안해 주시고요. 눈동자에 촉촉한 기를 머금을지 여부도 함께 고민해주셨어요.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그렇게 김무준만의 소현세자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의 국본으로서의 고뇌, 청나라와 인조 사이에서의 고통 등을 차분히 그려냈다. 파트 2는 세자로서의 성장까지 담아낼 예정이다.
"소현세자는 파트 1에선 장현(남궁민 분)을 상대로 화를 버럭 냈죠. 조급한 모습도 보이고요. 파트 2에선 본격적으로 성장합니다. 13부와 14부는 특히 주목해서 봐 주셨으면 해요."
◆ "김무준의 꿈은, 물 같은 배우"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극장에서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을 봤다. 눈물이 났고, 웃음도 터졌다.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며 결심했다. 배우가 되자고.
물론 쉽지 않았다. 입시는 줄줄이 낙방. 군대를 다녀와서야 예대에 입학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한편으론 계속해서 오디션을 보며 꿈을 키워나갔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고도, 계속해서 생계형 알바를 했다. 그 경험이 성장의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실에는 일용직 출입 카드를 눈에 띄게 걸어두었다.
"데뷔 후에도 심야 택배 상하차 알바를 했었어요. 영하 20도에 목장갑만 끼고 짐을 나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지금도 나태해지지지 않기 위해, 매일 출입카드를 보며 촬영장에 갑니다."
그의 열정은, 그때와 똑같다.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른다. "정극 데뷔한 지 3년 밖에 안 됐는 걸요. 모든 경험이 소중해요. 소현세자 역을 통해서도 너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역이든 가리지 않고 하려고요.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김무준이 자신의 최종 목표를 전했다.
"흐르는 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청계천의 물은 바위를 만나더라도 어쨌든, 흘러갑니다.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힘들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려고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쭉 연기하겠습니다."
<사진=이호준기자, '연인'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