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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음감] 에스파가 던지는 2024년의 K팝, 우린 어디서 왔나

K팝에 대한 고찰은 무수한 '현실 자각 타임'을 동반한다. 일상적인 내려보기와 편 가르기, 겉핥기식 해석 같은 외적 요소들부터 횡행하는 부조리, 개선이 요원한 작업 환경과 반복되는 사고 등 원초적으로 품고 있는 산업 자체의 모순을 견디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제작 과정을 딛고 세상에 내놓아진 결과물은 역설적으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 황홀함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 의해 K팝은 지난 30여 년의 역사 동안 독특한 음악 양식이자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며 오늘날의 지위를 갖출 수 있었다.

K팝은 수천 번 죽고 다시 태어났다. K팝 망한다, K팝 위기설, 흔들리는 K팝 등의 표현은 이제 닳고 닳아 익숙하다. K팝은 언제나 위태로웠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한 번도 밝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만큼 이 표현이 진지하게 다가온 해는 없었다. 지난 10년간 우상향 곡선만 그렸던 음반 판매량도 올해 처음으로 꺾였고, 음반 수출 또한 줄어들었다.

매출보다 더욱 뼈아픈 상처는 K팝에 대한 의구심과 거듭되는 실망으로 빚어진 실존적 위기였다. 성공을 향해 직진하며 몸집을 불려 가던 구태의 논리가 밀실로부터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던 순간마다 우리는 K팝에 보내는 환호를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도 K팝은 망하지 않았다. 각종 사건·사고와 냉소적인 시선 속에도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하며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대중의 즉각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혼란한 시대를 관통한 음악으로 K팝의 불빛이 광장을 수놓은 광경은 분명한 올해의 상징적 순간이었다.

지난해 K팝 결산 기고의 제목은 '기승전뉴진스'였고 마지막 문장은 '적어도 뉴진스라는 무균실에서는 근심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였다. 올해 우리는 뉴진스의 청정구역이 일종의 피난처였음을 확인했다. 레이블 구성부터 품고 있던 갈등의 씨앗은 숱한 전횡과 투명하지 않은 일 처리, 수직적인 의사 결정 체계에 의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단단해 보였던 모래성에 균열을 내었고, 올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커다란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제 판단은 법원의 몫이다. 그러나 오래 고민해야 할 수많은 질문이 던져졌다. 기획사와 아이돌, 아이돌의 노동권, 기획자와 회사 등 본질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반복되어서는 안될 구습은 이미 모두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위클리 음악산업리포트'는 하이브 내 독소처럼 퍼져있던 해로운 문화의 상징이다. 낯 뜨거운 언어로 쓰인 K팝 예술가들에 대한 품평과 비난은 '업계에 대한 이해'라는 명목으로 요약을 주문한 이들의 사고방식을 짐작게 한다. 나 또한 나의 의견이 누군가의 가공을 거쳐 합리화와 평가의 수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다.

논쟁과 이해관계로 점철되었던 논의를 떠나 인상적인 결과물을 이야기해 보겠다. 싱글로만 활동했지만, 뉴진스의 파급력은 더 거대해졌다. 뉴진스의 미감은 지난 30여 년간 K팝 기획의 중추에 있던 중년의 남성 제작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련됨과 재미를 갖추고 있다. '하우 스윗(How Sweet)'과 '슈퍼내추럴(Supernatural)', '버블검(Bubble Gum)'이 투사하는 가공된 과거는 실제로 20세기를 겪어보지 못한 오늘날의 10대들에게까지 마치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력하다. 버블 경제 시대의 곡이 아닌데도 바다 건너 한국인들에게 일본 호황기의 추억을 소비하게끔 만든 하니의 '푸른 산호초'는 뉴진스 기획의 힘과 오늘날 뉴진스의 막강한 파급력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하이브의 올해 가장 큰 실책은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자사가 기획한 인상적인 결과물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데 실패한 것이다. BTS의 '러브 유어셀프'로 대표할 수 있는 거대 서사의 시대가 지나고 개인의 취향과 파편적인 메시지 함양이 대세가 되어가는 가운데 여전히 잘 짜인 세계관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안긴 작품이 다수 나왔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미니소드3: 투모로우(minisode3: TOMORROW)'는 그룹의 최고 작품이다. 팀을 상징하는 마법의 불빛이 꺼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그들을 믿고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하겠노라 다짐하는 이야기의 힘이 강력했다. 엔하이픈의 성공적인 웹 IP '다크 문:달의 제단'의 스페셜 앨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아이돌 그룹 사가보다 그를 바탕으로 창작한 2차 서사가 더욱 독특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려줬다.

숱한 잡음 속에도 아일릿의 '마그네틱(Magnetic)'이 올해의 노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애틀랜타 베이스와 플러그앤비 장르의 트렌디한 운용, 숏폼 콘텐츠 시대의 일렉트로닉이 '슈퍼 이끌림'이라는 노랫말과 함께 2024년의 미디어 환경을 대표하는 곡으로 남았다. 플레디스의 신인그룹 투어스의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빠질 수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은 학창물과 성장 서사로 안식을 원하는 대중의 공감을 획득했다. 야심 찬 미국 프로젝트 그룹 캣츠아이의 '터치(Touch)'는 현지화 그룹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을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저명한 감독 나디아 홀그렌의 '팝스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역시 흥미로웠다.

캣츠아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케이(K)'를 떼어내야 한다는 방시혁 의장의 다짐은 다른 이들의 야심 찬 프로젝트로 결실을 보았다. 블랙핑크로부터 흩어져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제니, 리사, 로제는 한국의 사브리나 카펜터, 찰리 XCX, 차펠 론이었다. 확고한 음악 지향과 초국적인 팬덤을 바탕으로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며 흥행한 이들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K팝이 더는 한국에서 제작되지 않는 미래 풍경을 미리 보여주며 '넥스트 K팝' 정의에 불을 붙였다. 리사의 '록스타(Rockstar)'와 같은 과감함, 로제의 '아파트(APT.)' 같은 외부인의 시선은 기획으로만 가능한 결과물이 아니다.

일본 걸그룹 XG의 'AWE'는 K팝 포맷을 도입하여 제작한 그룹이 이제 현지의 문화와 더욱 전위적인 기획, 세계와 함께하는 메시지로 원조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음을 들려준 작품이었다. K팝 블록버스터의 왕관은 이제 스트레이키즈와 에이티즈의 것이다. 자체 제작이 가능한 이들 다인원 보이그룹들은 큰 소리와 큰 울림, 온몸을 던져 무대를 부수며 포효한다. 스트레이키즈의 '합 合 (HOP)'과 '골든아워 : 파트 1(GOLDEN HOUR : Part.1)'은 이들의 성장 가능성이 더욱 무궁무진함을 알리고 있다.

미시 서사의 시대는 창작할 수 있는 개인들과 소규모 기획사들의 활약을 불렀다. 이는 거대한 서브컬처인 K팝에 더욱 소규모의 다양한 취향이 결정권을 쥐는 결과로 나타났다. 올해 등장한 신인 보이그룹 중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인 82메이저는 그중 으뜸 사례다. FNC 전 상무 김영선이 설립한 그레이트엠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이들은 '촉'과 '혀끝'을 통해 재치 있는 뮤직비디오와 당찬 퍼포먼스, 이를 뒷받침하는 적재적소의 코디와 훌륭한 미감으로 '잘한다'는 식상한 단어를 만족시켰다. 이해인 디렉터의 기획으로 다듬어진 키스 오브 라이프의 활약도 대단했다. '마이더스 터치(Midas Touch)'와 '스티키(Sticky)'는 영미권 팝 트렌드의 최전선 문법을 영리하게 다듬어낸 결과물이었다.

마침내 24명 완전체로 등장한 트리플에스의 '어셈블24(ASSEMBLE24)'의 최면술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룹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구심부터 매끄럽지 않은 프로젝트의 방향 등 숱한 혼란이 '다시 해보자'며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걸스 네버 다이(Girls Never Die)'와 다인원 그룹 퍼포먼스를 통해 흔들리는 청춘의 송가로 우뚝 서는 순간은 분명 상징적이었다. 정병기 디렉터와 더불어 올해는 이달의 소녀 출신 그룹 및 솔로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해기도 하다. 아르테미스가 선사한 비주얼 쇼크 '버추얼 엔젤(Virtual Angel)'와 탄탄한 프로듀싱으로 무장한 앨범 '달(DALL)', 고유의 개성을 십분 살린 '스트로베리 러시(Strawberry Rush)'를 내놓은 츄, yyxy 시절을 떠올리게 한 루셈블의 'TTYL'과 이브의 '아이 디드(I did)' 앨범이 즐거움을 주었다.

(여자)아이들의 전소연이 쏘아 올린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의 유행은 지난해부터 한국에서 가시화된 제이팝 인기가 록 음악과 밴드 포맷에 대한 선호와 함께 역주행한 사건이었다. 이는 인터넷 방송과 커뮤니티로부터 결성된 QWER이 빠르게 팬들을 결집하며 그 수요에 맞는 '고민중독'으로 한국 유튜브 뮤직 생태계를 점령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 영광의 으뜸에 데이식스가 있다. 내년이면 데뷔 10주년을 맞는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밴드는 4인조 재편과 멤버 전원 제대 후 발표한 복귀작 '포에버(FOURERVER)'로 2024년의 국민가요 칭호를 거머쥐었다. 오래도록 다듬어온 자체 제작과 실연 능력, 작곡가 홍지상과 함께 단순한 구조 위 역설을 담는 창작이 K팝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즉각적인 흥을 불러일으켰다. 스트레이키즈와 데이식스는 오래도록 K팝에서 그룹을 홍보하는 데 그쳤던 '자체 제작'이 미래의 필수 성공 사례임을 보여주고 있다.

숨가쁘게 달려왔다. 2024년의 K팝 성공의 모든 총합이 에스파에게 있다. 극도로 어지러웠던 경영권 분쟁에도 잃지 않았던 음악 자산과 노련한 기획은 인공지능 유토피아 광야를 활보하던 에스파를 미지의 공간에서 불쑥 나타난 초자연적 존재로 비틀었다. 비범한 초능력을 갖춘 이들이 현실을 활보하며 불길하게 '원조 그걸 찾아'를 읊조리던 '수퍼노바(Supernova)'의 악몽과 크툴루 신화를 방불케 하는 강탈의 공포 '아마겟돈(Armageddon)'은 K팝, 더 나아가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디지털 시대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안드로이드 위버멘쉬로 초월한 '위플래시(Whiplash)'까지 올해의 에스파는 영민했고 불안해하는 대중의 부름에 즉각 응답했다. 12월의 탄핵 집회에서 수많은 노래 중 '위플래시'가 군중의 구호에 맞물려 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린 어디서 왔나 아 오 에'. 2024년의 K팝은 묻는다. 더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나 덮어놓고 가자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극도로 정치와 엮이는 것을 꺼리며 이익 추구에 몰두하던 K팝 기획사의 그룹과 음악이 오늘날 광장에서 행동하는 소녀들의 송가로 울려 퍼진다. 거리를 수놓는 응원봉의 불빛을 목격한 이들이 과연 그 응원봉을 소비하게끔 하는 K팝의 자본주의적 이윤 창출 시스템과 침묵이 답으로 여겨지는 환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답답한 현실 속에도 K팝은 여전히 작동한다. 숱한 논란에도 K팝을 사랑하는, 자기 일을 아끼고 그 결과물을 사랑하는 이들의 힘으로 K팝은 전진한다. 계약 해지와 경영권 분쟁, 사건 사고와 비난, 혼란한 현 시국에도 K팝은 컨베이어 벨트의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선과 악도, 옳고 그름도 없는 이 복잡하고도 부글거리는 음악의 용광로에서 사건은 계속된다. 질문도 계속된다. 우린 어디서 왔나.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모드하우스, 빅히트뮤직>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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