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다은기자] 또 비슷한 결의 연기가 아닐까,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배우 전도연이 영화 '리볼버'를 찍으며 가장 많이 고뇌한 지점이다.
'무뢰한'(2015)이 신경쓰인 것도, 사실. 그도 그럴 게, 같은 감독(오승욱), 같은 장르, 같은 분위기였다. 시나리오를 받고, 연기를 하면서도 고민은 계속됐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본 뒤에는 만족감마저 들었다. 전도연은 "지루함은 나만의 우려였다. 우리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놀랐다"고 자신했다.
'디스패치'가 또 다른 얼굴을 완성한 전도연을 만났다. 그는 수수한 민낯에 흰 소매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했다. 옷차림처럼 모든 답변에 꾸밈없고 거침없이 답했다.
◆ "시작은 당황스러웠다"
'리볼버'는 범죄 누아르 영화다. 전직 경찰 '수영'(전도연 분)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출소한다. 이후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 시나리오의 시작은 전도연이었다. 그가 어느 날 오승욱 감독을 만났다. 당시 오 감독은 준비하던 작품의 대본이 풀리지 않았던 상황. 전도연은 "가볍고 유쾌한 저예산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다림은 예상보다 길었다. 오 감독은 4년에 걸쳐 '리볼버'의 대본을 완성시켰다. 전도연은 "대본이 완성되는 사이 '길복순'과 '일타스캔들'까지 찍었다"며 웃었다.
전도연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당황했다. 오래 걸렸고 또 예상했던 작품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무뢰한'과 비슷한 무드라, 중복되는 걸 피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의리와 신뢰로 출연을 결심했다. "4년 전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감독님이 원하는 걸 짜내서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며 "그때부턴 '무뢰한'과 어떤 차이를 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촬영에 들어가고 난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감독님에게 맡겼습니다. 이야기와 기술적인 부분 모두를요. 저는 그저 오 감독의 '리볼버'를 어떻게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애를 썼습니다."
◆ "앵무새처럼 같은 표정만 짓는 건 아닐까?"
영화의 핵심 서사는 하수영의 복수극이다. 수영은 114분 동안 대가를 돌려받겠다는 목적 하나로 거침없이 움직인다. 어떤 상황에도 감정의 변화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전도연이 캐릭터 구축을 위해 감독과 가장 먼저 이야기한 건 엔딩이었다. "오 감독이 '꽁치에 소주 한 잔 마시는 이미지로부터 수영의 서사가 시작됐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오 감독 영화에서 느껴지는 이런 씁쓸함이 좋다"고 전했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 속 전도연은 유독 무표정 연기에 집중한다. 전도연은 "찍는 내내 스스로 지루하지 않나 걱정됐다. 앵무새처럼 같은 표정만 짓고 있는 것 같아 의심했다"고 설명했다.
"감독님께 '이게 맞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오 감독은 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죠. 어떤 색깔로 담아낼지는 그의 몫이었기에, 믿고 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영의 고요한 분노는, 누구보다 제대로 표현해내고 싶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걷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무뢰한'의 색깔을 벗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했다.
전도연이 '무뢰한'의 톤을 가장 깊이 느낀 구간은 수영의 과거였다. "과거의 수영은 김혜경과 닮아있다. 자기 욕망이 있고, 겉은 화려한데 잘못된 사랑을 하며 또 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고 짚었다.
극 중 수영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 만큼, 카메라는 그의 미세한 얼굴 표정과 변화를 더 가까이 담아낸다. "클로즈업 샷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다. 스크린 속 모습이 예쁘든 거칠든, 수영이 잘 담기기만을 바랐다"고 설명했다.
◆ "얼굴의 향연, 후배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완성된 전도연의 또 다른 얼굴은 새로웠다. 차가운 수영을 탄생시켰다.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여자다.
유일하게 뜨거울 때는, 대가를 받아야만 하는 상대를 만나는 신. 전도연의 액션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분량은 적지만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전도연은 "허명행 무술감독님의 제안에 따라, 촬영 전 연습 없이 현장에서 바로 동선을 맞췄다"며 "길복순 때보다 더 잘 되더라"며 웃었다.
후배 배우들과의 케미스트리도 한몫했다. "영화를 보니 배우들 얼굴에서 서사가 느껴졌다. 지창욱과 임지연이 단순한 이야기에 색을 덧입혔다"며 "두 캐릭터의 색깔이 수영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지창욱과 임지연은 '리볼버'에서 신선한 캐릭터로 변신했다. 지창욱은 일명 '향수 뿌린 미친개'이자 수영의 대척점에 있는 앤디로 분했다. 임지연은 백치미 가득한 수영의 조력자 정윤선을 연기했다.
전도연은 두 배우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지창욱과의 첫 신에서 너무 놀라웠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연기 톤과 캐릭터였다"고 했고, "임지연은 저희 영화에 색을 입혔다"고 칭찬했다.
이정재와는 '하녀' 이후 14년 만에 재회했다. 이정재는 수영의 과거 연인으로 등장한다. "정재씨가 부상으로 '무뢰한'을 못했어서, 감독님께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나온 게 아닐까 싶다"며 "현장에서 늘 젠틀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했다.
◆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어느새 데뷔 35년 차. 전도연은 그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꾸준히 달려왔다. 앞으로는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을까.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전도연은 "매너리즘에 빠질 만큼 대단한 걸 해보지는 않았다"며 "배우는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늘 새로운 작품과 배우들을 만나고 작업한다. 해보지 않은 게 더 많아 스스로를 괴롭힐 때가 있다"고 답했다.
"사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저도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라는 생각은 못 해본 것 같습니다. 늘 '더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편이었죠."
전도연을 또 다르게 지칭하는 말은 '칸의 여왕'. 사실 왕관의 무게는 무거웠다. "'밀양'으로 칸에서 상을 받고, 무거운 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그 이미지를 깨고 싶었고 공백기도 길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한 이미지를 굳이 벗으려고 노력하기보다, 모든 걸 내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가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전도연은 새로운 도전에도 거침없이 나서고 있다. 시기. 연극 '벚꽃동산'으로 관객을 만났다. "연기를 하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무대에서 힐링이 됐다"며 "매일매일 새로운 연기를 하게 됐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현장이 젊어졌고, 세대 교체가 됐다"며 "그 사람들에게 내가 대선배라 어려운 사람이 됐다면, 먼저 다가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젊은 감독님과 일 해보고 싶다"고 바랐다.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