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연상호 감독은 '넷플릭스 공무원'이라 불릴 정도로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연니버스' 세계관을 무한 확장 중이다.
물론, 모든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은 건 아니다. 넷플릭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어땠을까.
"재미있어서 단숨에 다 봤다", "원작에 대한 리스펙이 느껴진다", "일본판과는 달리 인간미와 감정을 표현해서 좋았다"
일본 시청자들과 원작 팬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연상호 감독 역시 '기생수'의 오래된 팬. 원작에 대한 애정을 담아 팬픽을 쓰는 마음으로 집필했다.
원작자 이와아키 히토시 역시 완성본을 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30년 된 만화가 다른 창작자를 통해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호평했다.
글로벌 반응 역시 뜨겁다. 2주 연속(17일 기준)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시리즈물 1위에 올랐다. 총 84개국에서 톱 10 안에 들었다.
우리가 알던 연상호가 돌아왔다.
◆ "팬픽을 쓰는 마음으로"
'기생수: 더 그레이'는 누적 판매 2,500만부 이상을 기록한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한다. 세계관을 한국으로 확장한 스핀오프의 형태로 제작했다.
인간을 숙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려는 기생생물들이 등장한다. 이를 저지하려는 전담팀 '더 그레이'의 작전이 시작된다. 이 가운데 기생생물과 공생하게 된 인간 수인(전소니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원작에 기대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풀어냈다. 일본에서 원작 만화에서 다루는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의 상황은 어땠을까. 이 상상에서 출발했다.
"스타워즈도 팬들이 만들어낸 스토리가 더 많잖아요. '기생수: 더 그레이'도 그런 관점에서 만들었습니다. 팬으로서 재미있게 완성했어요."
처음에는 판권을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스핀오프 형태로 파생된 작품도 많았다. 그러나 원작자 이와아키 히토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점에서 끌렸던 것.
"기생수는 '인간의 머리를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생수의 우두머리인 권혁주는 다르게 판단하죠. 생물학적 머리가 아닌, 무리의 우두머리를 차지하라고요. 그런 발상을 재미있게 보신 것 같아요."
◆ 연상호의 크리처
원작에선 기생생물이 손에서 튀어나왔다면, 이번엔 머리를 열고 모습을 드러낸다. 유연한 촉수의 형태. 더 기괴한 비주얼로 연상호만의 크리처를 탄생시켰다.
연 감독은 "구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원작에서 머리카락이 촉수로 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CG로 구현하려고 하니 이질감이 크더라"고 털어놨다.
"일본 실사 영화에서도 머리카락이 촉수로 변하는 과정을 안 보여주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지 집요하게 고민했습니다. 촉수가 지나가는 머리카락의 세세한 리액션까지 계산했죠."
시그니처 액션신도 만들어냈다. 일명 상모돌리기. 기생생물들이 인간의 머리를 열고 촉수를 드러내 무기처럼 휘두르는 모습은, 상모돌리기와 닮아있었다.
연 감독은 "부산행' 때 몸을 기이하게 꺾는 좀비를 탄생시켰다. 아파트 단지에서 초등학생들이 팔을 꺾고 놀고 있더라"며 "상모돌리기도 유행할 거라 믿는다. 조금 이상한 지점이 있었어야 되는 것 같다"고 농담 섞인 소망을 전했다.
◆ 연니버스의 얼굴들
전소니는 연니버스에 새롭게 합류했다. 초반 수인의 우울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하이디와 교감하며 변화하는 모습까지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연 감독은 "전소니는 첫 촬영 때 이미 수인이었다. 수인이 가진 불우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풍기게 했다. 굉장히 영리한 배우"라고 칭찬했다.
구교환(설강우 역)은 연 감독과 영화 '반도', 드라마 '괴이'에 이어 다시 만났다. 3번째 호흡인 만큼 구교환 특유의 능글맞음을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연 감독은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강우다. 무거운 느낌의 배우가 하면 힘이 너무 들어갈 것 같더라"며 "구교환이 유쾌함과 진지한 포인트를 나눠서 잘 완성해 준 것 같다"고 전했다.
다만, 이정현(준경 역)의 연극적인 연기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는 "'지옥'의 화살촉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과장된 얼굴을 표현하게 했다. 호불호가 있는 것이 당연한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준경은 가짜 광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몇몇 순간에는 클로즈업이 들어갑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이 달라 보였으면 했어요."
◆ 공생의 의미
드라마는 '조직과 개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조직폭력배 일원인 설강우,, 종교단체를 이끄는 권혁주, 경찰팀 '그레이'의 수장 준경 등….
반면, 수인은 최초의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가족에서 탈락한 인물이다. 가정폭력으로 아버지를 신고하고 홀로 살아간다. 어느날, 하이디라는 기생생물과 공생하게 된다.
연 감독은 "수인은 하이디와 소통하며 성장하고 조직에 스며들게 된다"며 "서서히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권혁주는 '인간은 기생을 하며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수인은 '인간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말하죠. '기생한다'가 '의지한다'는 워딩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기생'을 소재로 '공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진 않는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조직의 폐해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결말에는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죠. 저도 여러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런 혼동을 느낍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 변화, 그리고 꾸준함
애니메이션 시절 연상호의 무기는 뚜렷했다. 특유의 음울한 전개와 희망 없는 결말, 그리고 날카로운 비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색깔은, 사회적 메시지를 지닌 휴머니즘에 가깝다.
변화에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는 "새벽에 나오는데, 젊은이들이 벚나무 아래 밤새 술 마시고 뻗어있더라. 젊으니까 가능하구나 싶어 예뻐 보였다. 제가 지금 그렇게 하면 추한 기성세대일 뿐"이라고 말했다.
"상업적으로 넘어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바뀌었어요. 그때와 지금의 연상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작품도 자연스럽게 변하는 거죠."
그는 쉬지 않고, 지금의 연상호가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나갈 예정이다. '기생수'를 공개하자마자 '계시록' 촬영에 돌입했다. '지옥2'는 마무리 작업 10%만 남겨둔 상태다.
연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밖에 없다"며 "일년에 2개는 쓰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가둬놓고 계속해서 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가끔은 플릭스 패트롤이라는 성적이 저를 움직이게 하기도 하죠. 하지만 가장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마음이 맞는 스태프들과 목적지를 향해 갈 때 가장 즐겁습니다."
이제 새로운 변신을 꿈꾼다. 연니버스, 그 다음 챕터를 준비 중이다. "지금부터는 다른 것을 하려고 의지를 부리고 있다. 돌파구를 찾고 싶다. CG 없이 카메라로만 찍고 있는 작품도 있다"고 귀띔했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