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김혜수는, 인터뷰 도중 '배우'의 한자를 다시 짚었다.
"배(俳)라는 한자는요. 사람 인(人)에 아닐 비(非)를 보탠 말입니다."
그는 "배우는 사람이 아닌 일을 하는 직업이다. 가짜를 진짜처럼 표현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 역으로, 역할 자체에서 진짜를 찾으려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배우는 어디에서 '진짜'를 찾아야 할까.
"그럼에도, 태도는 진짜여야 합니다. 눈빛, 입매, 손짓, 마인드…. 연기하는 모든 순간, 모든 부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죠. 저는 그게 바로 진짜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김혜수가 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인터뷰 내내 언급한대로, 촬영 내내 '진짜'를 바쳤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다양한 얼굴로 영화 '밀수'(감독 류승완)을 완성했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춘자의 키워드는, 생존"
'밀수'는 1970년대 해녀들의 이야기다. 올해 개봉작 중 유일한 여성 투톱 주연물이다. 류승완 감독은 시나리오를 작업 할 때부터 김혜수와 염정아를 염두에 두고 썼다.
춘자는 외로운 여자다. 가족 없이 홀로 떠돌며 살아왔다. 바닷마을 군천에서 진숙(염정아 분)을 만나고, 겨우 정착해 산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일까. 춘자에게서 '타짜'의 정마담이 떠올랐다. '도둑들'의 펩시도 연상됐다. 그들과의 차이점은, '생존'이라는 키워드.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
김혜수는 "춘자는 자신을 100% 솔직하게 보여줄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며 "괜찮지 않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한다. 위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춘자를 연기하며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을 했어요. 특히 초반에는 힘이 들어가 보이도록 했죠. 제가 이해한 춘자는, 생존이 절실한 여자였거든요."
김혜수의 전략은 영리했다. 춘자는 초반과 후반의 심경 변화가 드라마틱한 캐릭터. 초반의 허세 덕분에 캐릭터의 매력이 한층 풍성해졌다.
◆ "100을 준비해도, 변수가 생긴다"
춘자의 생존력이 가장 도드라진 건, 진숙과 3년 만에 재회하는 신. 진숙은 춘자에 대한 원망을 담아 따귀를 날린다. 춘자는 이에 지지 않고 공격한다.
"진숙이는 이유있는 폭력이었어요. 그런데 춘자는 이유가 없어요. 때리면 바로 받아쳐야 돼요. 왜냐면 그래야 살아남는 사람이거든요. 진숙이 멈추지 않았다면, 열 번도 더 때렸을 겁니다."
원래는 한 대씩 주고받는 장면이었다. 현장에서 한대씩 더 추가됐다. 김혜수의 아이디어였다.
김혜수는 "진숙이는 춘자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대로는 안 끝났을 것 같았다. 그래서 쌍 따귀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모든 신에는 이유가 있고, 의도가 있었다. 그렇다고 준비한 대로만 연기하지 않았다. 김혜수는 "100개를 준비해도, 결국 현장이 전부"라고 강조했다.
"항상 여러가지를 준비하고, 시뮬레이션해서 갑니다. 그래도 현장에 가면 다 달라져요. 생각한 대로 되지 않죠. 그걸 고집해서도 안 되고요. 상대방의 연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상사(조인성 분)와의 관계도 그랬다. 춘자는 권상사와 밀수를 위해 힘을 합친다. 그러나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을수록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협력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둘 사이에 미묘한 찰나가 있을 수 있겠다는 걸 현장에서 느꼈죠. 그게 영화에 포착된 거고요. 현장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 "수중 공포는, 팀워크로 극복"
새로운 도전도 있었다. 바로 수중 액션신. 해녀 역을 맡은 배우들은 3개월간 수중 훈련에 들어갔다. 김혜수는 당시 넷플릭스 '소년심판'을 촬영 중이었다.
시간 관계상 다른 배우들만큼 제대로 훈련하지 못했다. 심지어 영화 '도둑들' 수중 촬영 때 공황 상태를 경험했었다. 자연히 두려움이 뒤따랐다.
김혜수는 "공황만 아니면 수중신이 무섭진 않았다. 한데 신기하게도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니까 이겨낼 수 있었다"며 "나중에는 물속에서 대화까지 할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물에 들어가기 전 사인을 주고받고 촬영에 들어가요. (염)정아 씨와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그 순간만큼은, 춘자와 진숙이보다 더 진한 사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자잘한 부상들은 피할 수 없었다. 수중 촬영 도중 이마가 찢어졌다. 땡볕에서 화상을 입었고, 입술도 터졌다.
김혜수는 "이마가 찢어졌을 땐, 다친 것보다 현장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속상했다"며 "부상도 압도할 만한 배우들 간의 일체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도 또 하나 배웁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팀이고, 나의 정체성은 팀원이라는 것을요. 팀워크가 영화의 성패로 직결될 순 없죠. 그러나 모든 과정에서 있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장 진짜였던 장면은"
'밀수'에서 김혜수 연기의 절정은, 진숙과 독대하는 신 아닐까. 두 사람은 영업을 마친 다방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진심을 털어놓는다.
춘자는 극 내내 하이톤으로 임기응변만 해낸다. 그러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진숙 앞에서 약해진다. 가장 여린 내면을 드러낸다. 낮은 톤으로, 거친 욕과 함께 진숙을 부른다.
그 순간, '밀수'의 장르가 바뀌었다. 범죄 활극에서 드라마로 반전된 것. 그 이름 하나에 원망, 분노, 그리움, 사랑…. 다채로운 감정이 절절히 쏟아졌다.
김혜수는 "'밀수' 안에서 가장 진짜여야 하는 장면이었다"고 설명했다.
"춘자가 군천으로 돌아간 건, 진숙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돌아간 거죠. 스토리상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는데요. 연기는 가짜일지 몰라도, 그 순간의 몰입은 진짜였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했어요."
그는 "우리가 실제 상황에서도 모든 게 진짜는 아니지 않냐. 영화에서도 모든 게 진짜면 재미가 없다"며 "그런데 정말 진짜여야 할 때가 있다. 그땐 군더더기 없이 진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혜수는 인터뷰 내내 '진짜 연기'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물을 차례. 37년 차 배우 김혜수가 생각하는, 진짜 연기란 무엇일까.
"사실, 진짜 연기라는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는 거죠. 진짜 중의 진짜를 따진다면, 그 순간에 나오는 게 아닐까요?"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