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윤제균 감독이 영화 '영웅' 인터뷰 도중,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윤 감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가 천주교도였다는 것,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었다는 것, 평화주의자였다는 것, 이제 진짜 유해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것….
실제로, 우리는 안중근을 잘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애국지사라는 정도? 안중근의 사상, 전쟁, 동지, 유해 등등을 명확하게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영웅'은 그래서 감사한 영화다. (진짜) '영웅' 안중근의 삶을 세심하게, 또 치열하게 압축해 감동을 불어넣었다. 그러기 위해 고증에도 충실했다.
(※ 역사가 곧 스포일러입니다. 때문에, 기사에 '스포일러 주의'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알고 보면 더 감동적이고, 보고 나서 확인하면 더 뭉클할 테니까요.)
꼭 알아야 할 안중근 이야기, 10가지를 준비했다.
① "안중근 의사의 또 다른 이름은 '도마'였다?"
☞ 영웅 : 모친 조마리아(나문희 분) 여사는 아들 안중근(정성화 분)을 '도마'라고 부른다. 도마는 토마스를 음차로 표현한 것. 그가 배냇저고리를 만지며 편지를 쓰는 부분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 팩트 : 안중근의 별명은 안응칠. 배와 가슴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응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향은 황해도 해주. 안중근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 때부터 이미 도내에 널리 알려진 자산가 집안.
집안의 종교는 실제로 천주교였다. 1880년대 말, 부친 안태훈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됐다. 안중근 역시 19세 경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천주교 사상에 깊이 빠졌다. 복음을 전파하는 연설을 하러 다닌 것.
안중근 집안은 프랑스에서 파견된 선교사들(니콜라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 등)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안중근도 마찬가지. 그는 천주교의 힘을 빌어, 조선에 대학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서양 수사회에서 박학한 분들을 모셔와, 우리나라에 대학교를 설립해 주십시오. 그후 나라 안 뛰어난 자제들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안중근)
그러나 뮈텔 주교는 냉담했다.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질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고 거절한다.
이에 안중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을 믿지는 않겠다"고 깊게 다짐한다. 더불어 배우던 프랑스어도 그만뒀다.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프랑스어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우리 한국말을 두루 사용할 것이다." (안중근, 『안응칠 역사』 中)
(참고로, 뮈텔은 훗날 어마어마한 친일 행적을 보인다. 하얼빈 의거를 살인행위로 규정했으며, 신자 자격도 박탈했다. 신민회를 궤멸시키도록 제보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②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
☞ 영웅 : '영웅'이 묘사하는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당당한 군인이다. 오프닝, 안 의사는 집을 떠나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그는 부대의 '대장님'으로 불렸으며, 일본인 포로들을 살려줬다. 그러나 그 포로들의 밀고로, 수많은 부대원들을 잃었다.
☞ 팩트 : 안중근은 실제로 대한의군 소속 참모중장이었다. 1907년 10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고, 연해주 의병의 핵심으로서 약 2년 간 의병투쟁을 벌였다.
1980년 7월, 연해주 의병의 국내진공작전. 안중근은 휘하에 200명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당시 우덕순은 600명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함께 참여했다.
영화가 다룬 건, 신아산 전투와 회령 영산 전투. 안중근은 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한 뒤, 만국공법을 들어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 이로 인해 일부 의병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안중근 부대는 일제 토벌대와 처절하게 맞서 싸웠다. 안중근 부대가 행한 마지막 전투는 회령 영산 전투. 안중근 부대는 이 전투에서 길 안내 1명을 얻었으나, 일본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 참패했다. 길 안내가 알고보니 일진회원, 즉 밀정이었던 것.
안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내내 '군인 신분'을 강조했다. 자신은 테러리스트 혹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 군인 자격으로 전쟁을 수행했기에, 전쟁 포로의 대우를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도중에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얼빈에 와서 공격을 가한 후에 포로가 돼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여순 지방재판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나를 판결해야 한다." (안중근, 『안응칠 역사』 中)
③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잘 몰랐다?"
☞ 영웅 : 영화에선 설희(김고은 분)에게 미션을 부여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인상착의를 전하기 위해, 가슴에 흰 손수건을 꽂은 것. 안중근 의사는 이를 통해 이토가 누군지 확인하고 총을 발사한다.
☞ 팩트 : 설희 캐릭터는 윤제균 감독이 만들어낸 연출. 단,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실제 이토 히로부미의 인상 착의를 정확히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늙은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히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고 생각한 나는,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신속히 네 발을 쏘았다." (안중근, 『안응칠 역사』 中)
공판 기록도 남아 있다.
안중근 : (총을 쏜) 순간에도 누가 이토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맨 앞에 가는 사람을 향해 병사들 사이에서 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자가 이토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뒤에 따라오는 두 세 사람을 겨눠 두세 발 정도를 더 쏘았다.
안중근 : (이토의) 얼굴은 모르겠으나 선두에 서 있었고, 복장이 특이했으며, 노인이었다. 그러므로 이 자가 이토가 아닐까 여겼다.
④ "하얼빈 의거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 영웅 : 안중근과 유동하(이현우 분)가 한 팀을 이뤄 하얼빈 역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덕순(조재윤 분)과 조도선(배정남 분)은 채가구 역에서 대기한다.
☞ 팩트 : 1909년 10월 23일로 돌아가보자.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는 이날 아침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고, 하얼빈 공원을 돌며 계획을 점검한다. 공원 인근 중국인 사진관에 들러 (마지막) 기념 사진도 촬영했다.
안중근 의사 일행은 여러 신문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일정을 체크했다. 하지만, 신문마다 말이 달라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조도선이 역무원에게 물어, "이토가 탄 열차가 채가구역을 26일 오전 6시에 지난다"는 일정을 확인한다.
그래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은 하얼빈 역에,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 역에 배치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 등은 모두 검거됐다.)
만일 이토가 채가구 역에 내렸다면? 하얼빈에서 총을 쏜 주인공은 우덕순이나 조도선이 될 수도 있었다. 후손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동지들까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⑤ "누가 죄인인가!"
☞ 영웅 : 안중근 의사의 법정 신. 주연 배우들이 모두 웅장하게 <누가 죄인인가>를 열창하는 신이다. 법원 밖에 모인 조선 사람들도 모두 일제의 침략과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한다.
☞ 팩트 : 안중근 의사는 체포 이후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의 심문을 받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가지를 열거했다.
첫째, 1894년 병사들을 황국에 돌입시켜 대한국 황후폐하(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광무황제를 위협하여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셋째, 1907년 무력으로 7조약을 체결하고 황제 폐하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넷째, 철도, 광산, 산림, 하천 등을 마음대로 빼앗은 죄요.
다섯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발행, 강제로 사용하게 해 한국 재정을 고갈시킨 죄!
여섯째,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일곱째, 국채 1300만원을 강제로 한국에 부담시킨 죄!
여덟째, 교과서를 압수해 불태우고, 신문을 인민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만든 죄!
아홉째,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한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열두째, 한국인들의 교육을 방해한 죄!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이천만 동포의 곡성이 울리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열넷째,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열다섯째, 1867년 일본 현 천황의 아버지 효명천황을 살해한 죄!
검사 역시 이에 감복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할 수 있겠소. 그러니 절대로 사형을 받진 않을 것이오. 걱정 마시오"라고 답했다.
하지만 일제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에 관여하며 검사의 태도는 달라졌다. 안 의사는 "폭력을 쓰고 모욕적 행동을 했다"고 기억한다. 재판장도 마찬가지. 실제 법정에선 재판장이 안중근 의사의 발언을 중단시키고 방청객들을 퇴정시키기도 했다.
⑥ "일본인 간수가 안중근을 존경했다?"
☞ 영웅 : 간수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은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 특히, 안 의사는 사형장 가기 전 지바에게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軍人本分)"는 글을 써줬다. 손도장도 찍어 낙관을 대신했다.
☞ 팩트 : 사실이다. 지바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사과드리고 싶다"며 머리를 숙였다. 당시 안 의사의 나이 31세. 지바의 나이 25세. 지바는 안 의사 순국 후 자진 제대하고 유묵을 평생 간직했다. 유묵을 앞에 두고 매일 예를 올려, 안 의사의 뜻을 기렸다.
사망 후에는 지바의 아내와 조카 등이 유묵을 보관해왔고, 1980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했다. 지바 도시치 측은 숭모회 기증을 계기로, 그해 안중근 추모비도 세웠다.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위치한 절 대림사. 지바 부부와 안 의사의 유묵 등은 사망 후 이 절에 모셔졌다. 지난 2002년, 일본 시민 1,000여 명이 기부를 통해 대림사에 또 다른 안중근 추모비도 건립했다.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지바 외에도 수많은 관리들이 존경을 표했다. 안 의사가 쓴 글을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며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어주고,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힘이 닿는대로 유묵을 써 선물했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이 났구려 / 마땅히 죽을 일에서 살기를 바람은 장부가 아니려니 / 몸은 비록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을 떨쳤소 / 살아 100년을 못 가지만, 죽어 1000년을 가오리다." (위안스카이가 남긴 안중근 추모시)
⑦ "조마리아 여사에게 편지를 받았다?"
☞ 영웅 : 눈물의 넘버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조마리아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위해 편지를 쓴다. 내용은 일제에 항소하지 말고, 죽으라는 것.
☞ 팩트 : 편지일까? 전언일까? 자서전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가 항소를 포기하고 며칠 뒤 동생들(안정근·안공근)이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어머니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들아.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걸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네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여기 네 수의를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조마리아 여사)
비하인드 추가. 안중근 의사는 동포들에게도, 동생들에게도, 각각 유언을 남겼다.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에게 "제 말을 기억했다가 동포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⑧ "수감 중 책을 썼다"
☞ 영웅 :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내내, 열심히 글을 썼다. 간수 지바 도시치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시냐"고 묻는 장면도 나온다.
☞ 팩트 : 안중근 의사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의 특별 면담에서 사형 날짜를 1달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책을 쓰기 위해서다.
안중근 : 만일 허가할 수 있다면,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춰 주시오. '동양평화론'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싶소.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 어찌 한 달 뿐이겠소.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2월 13일부터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집필했다. 탈고는 1910년 3월 15일. 총 93일에 걸쳐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안응칠 역사』 집필을 마친 후,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했다. 다만 (사형 날짜) 연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동양평화론』은 결국 미완으로 남았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란? 서문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즉, 동양이 힘을 모아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것.
안중근 의사는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했다. 인간 존중과 인류 공동 번영을 목표로 진보적인 제안들을 했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그의 정치적 감각도 엿볼 수 있다. 한중일간 평화 회의를 조직하고, 국제분쟁지역인 여순 항을 중립화하자고 주장했다. 공동은행 설립, 공동화폐 발행, 평화유지군 창설 등 아이디어도 냈다.
⑨ "그후 안 의사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 영웅 : 안 의사의 형제들(안정근·안공근)과 부인 김아려 여사가 의거 소식을 듣고 급히 여순 법원으로 향한다. 모친 조마리아 여사는 국내에 남아 있었다.
☞ 팩트 : 사실이다. 안 의사는 의거 직전, "모두 연해주로 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전한다. 이에 우선 조마리아 여사와 안현생을 제외한 가족들이 국외로 떠났다.
김아려 여사는 하얼빈 의거 이후 일제에 의해 유치장에 감금됐다 풀려난다. 국내의 조마리아 여사는 평양 헌병대의 추궁에도 태연히 맞섰다고 전해진다. 조 여사는 훗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정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안 의사의 집안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다. 조마리아 여사, 김아려, 큰딸 안현생, 아들 안분도·안준생, 동생 안정근 부부, 막내 동생 안공근 등이 모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났다.
그 후로도 가족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우선, 장남 안분도가 아버지의 순국(1910년 3월) 다음해 사망한다. 당시 안분도의 나이는 고작 7세. 낯선 사람(밀정 추정)이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
일제는 끊임없이, 지독하게 안 의사 가족들을 괴롭혔다. 차남 안준생은 30여 년을 버텼지만, 결국 일제에 굴복해야 했다. 193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고개를 숙인 것.
안준생은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린다"고 했고, 이 모습은 친일 신문들에 의해 기사화됐다. 김구 선생은 안준생을 '호부견자'라 비난하며 분개했다.
그럼에도, 안 의사 집안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안정근 선생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간도에서 독립 운동 선전 및 군자금 모집을 이어갔다.
안공근 선생도 러시아와 중국에 머물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이 됐으며, 러시아의 후원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특히, 친일파 암살과 처단 및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안타깝게도 안공근 선생은 1939년 5월 말, 중경에서 실종됐으며 유해조차 찾을 수 없다. 안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 외에도 안중근 집안의 독립운동가들은 수없이 많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들 안명근·안경근·안홍근, 오촌 조카 안춘생, 안명근 매제 최익형, 조카 안원생, 오촌 조카 안봉생, 안 의사 여동생(안성녀)의 며느리 오항선, 안춘생의 첫 번째 부인 조순옥, 안 의사의 작은 아버지 안태순 등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⑩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 영웅 : '영웅'은,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멘트로 끝이 난다. 그의 유언은 사망 이후 백여 년이 지나서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 팩트 :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후 그의 유해는 여순 감옥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동지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 의사를 배웅했다.
일제는 유족에게 끝내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안중근의 시신을 하얼빈 공원에 묻는다면, 하얼빈 공원이 반일 감정의 성지가 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관을 묻었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45년. 드디어 조국이 해방됐다. 김구 선생은 그해 11월 남한으로 온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차례로 모셔왔다. 효창공원에 삼의사의 묘를 안치했고, 네 번째 묘도 준비해뒀다.
네 번째 묘의 주인은, 다름아닌 안중근 의사. 그러나 김구 선생이 1949년 암살당했고, 안중근 의사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북 정부가 지난 2008년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으나 실패.
그러나 최근 의미있는 팩트가 나왔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10월, 옛 만주지역 신문 '성경시보'의 1910년 3월 30일자 기사를 공개했다. 형무소장이 하얼빈산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 의사의 유해를 안치하고 흰 천을 씌우도록 허락해줬다는 내용이 담겼다.
여순 감옥의 일반 사형수들은 원통형 관에 겹쳐진 채로 묻혀 있다. 그러나 안 의사의 관은 침관에 눕혀져 매장됐다. 전문가들이 추정하는 여순 감옥의 공동묘지는 인근의 둥산포 언덕.
안 의사의 유해, 이제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사진출처=영화 '영웅' 스틸·포스터,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방송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