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 | 부산=정태윤기자] 지난 1999년 영화 '박하사탕'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부산을 찾았다.
주연 배우로서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관객들의 눈빛은 "쟤네 뭐지"였다. 그러나 이는 2시간 10분 만에 180도 반전됐다.
"관객들의 반응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2시간 10분 만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영화 전에는 아예 모르는 남자였는데, 유명 인사가 된 거죠. 그때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설경구)
배우 설경구가 3일 오후 12시 부산 해운대구 우동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 열린 '액터스 하우스'에 참석했다. 그의 대표작을 짚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설경구는 "몇 년 전부터 '액터스 하우스' 제안이 왔었다"며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으로 앉아있는게 쑥스럽고 불편하더라. 올해는 '보통의 가족'으로 인사하는 김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의 찬란한 영화 인생의 시작은, 1999년이다. '박하사탕', '송어',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3작품으로 초청됐다. 그중 대표작은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박하사탕'.
신인 배우인데도 다양한 나이대와 감정선을 소화해야 했다. 성장이 아닌, 시작부터 완성형에 가까운 작품을 해야 했던 것.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설경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감독님이 대본도 많이 보지 말라고 했다. 거의 다 비워내고 현장에서 만들어 나가며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설경구를 비워내고 '김영호'를 채워 넣었다. 지금도 '박하사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 감정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멀어지려 해도 가장 멀어질 수 없는 인생작이다.
"부국제 당시에 '박하사탕'을 보는데 펑펑 울고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마음이 힘들어서 못 봐요. 지금도 감정이 올라오네요. 누군가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박하사탕'이라 말합니다. 이 정도의 희로애락이 있는 작품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고생한 작품은 한일 합작 영화 '역도산'(2004년)이 아닐까. 100kg 넘게 체중을 불리고 레슬링 기술을 수련했다. 독학으로 일본어 대사도 직접 소화했다.
배우연구소 소장 백은하는 "당시 현장에 취재를 갔는데, 가짜 피인데도 분장해 주시는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며 닦아주시더라"며 "설경구 배우의 단도처럼 빛나는 눈이 아직도 선하다"고 떠올렸다. .
설경구는 "그 정도로 마음을 나누며 촬영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3~4분을 필름이 다 돌 때까지 컷을 안 했다. 때릴 때도 아프고 맞을 때도 아팠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때 눈빛이 살벌했다. 조진웅 배우가 그때 저를 봤는데 다 씹어먹을 눈빛을 하고 있어서 그냥 도망갔다고 하더라"며 "꼴에 메소드를 한다고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나고서 보니 메소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메소드는 그냥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 설경구의 새 챕터를 열어준 건 영화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이다. 섹시한 중년미로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설경구는 "'불한당'을 하면서 저딴 게 감독이야 싶기도 했다. 감독님이 '가슴골을 보여달라, 턱선을 보여달라'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감정을 이야기해야지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런데 회차가 갈수록 너무 재밌더라"고 전했다.
"변성현 감독이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그냥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도 될 것 같더군요."
변성현 감독과는 연속 4작품을 함께한다. '불한당' 이후 '킹메이커', '길복순',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까지 연이어 호흡을 맞춘다.
설경구는 "지금도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불한상' 때 팀이 거의 다 '굿뉴스'에 합류했다. 처음엔 불신했었는데, 지금은 가장 믿음이 가는 팀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설경구는 다작 배우다. 디즈니 플러스 '하이퍼나이프'는 이미 촬영을 끝냈다. '굿뉴스'는 현재 촬영 중이다. 그에게 연기 원동력을 물었다.
"이 전의 모습이 겹치고 반복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요. 몰입한다고 해서 매번 되는 것도 아니고. 살을 빼고, 찌우고, 수염을 기르고, 파마를 하고 별짓을 다 하죠. 더 이상 할 게 없으면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쉬운 길을 걷지 않았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때론 감내하며 30년 넘게 연기 한길만 걸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시대가 너무 확확 변하니까 잘 모르겠다. 넷플릭스 '돌풍'이라는 시리즈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며 "바람이 있다면 사람으로서 나이를 잘 먹어가고 싶다"고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한편 '액터스 하우스'는 지난 2021년 처음 시작했다. 동시대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을 초청하는 스페셜 프로그램이다. 설경구는 '보통의 가족'으로 BIFF 관객들을 만난다.
<사진=송효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