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여기, 배우가 천직이라 믿던 남자가 있었다. 늘 영화계를 꿈꿨고, 할리우드에서 뛰놀길 소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별이 되길 꿈꾸는 청춘들은, 그야말로 별처럼 많았다. 그 사이에서 빛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견뎠다. 단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연기에 도전했다. 그렇게 9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시점…, 드디어 기회가 왔다.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KBS-2TV '태양의 후예'에 출연하게 된 것.
남자는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았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냈고, 주연 송중기와의 브로케미도 자랑했다.
이 남자의 10년차는, 그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잠깐이지만 인기의 맛을 봤고, 다시 일어날 희망을 얻었다.
'태후'의 북한군 안정준 상위 역을 연기했던 배우, 지승현의 이야기다.
◆ "연기 인생 9년, 가시밭길의 연속"
남들에 비해 데뷔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늘 연기를 갈망해왔지만, 26세에야 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다. 2007년 MBC-TV '히트'의 단역, 그것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9년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주인공의 선배(영화 '바람'), 지나가는 깡패 (KBS-2TV '꽃보다 남자') 등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늘, 그의 몫이 아니었다.
지승현은 "물불 가리지 않았다. 단 한 신만 나오는 역을 정말 많이 했다"며 "선후배가 없다보니, 늘 맨 땅에 헤딩하듯 일했다"고 전했다.
"많이 힘들었어요. 마음은 조급했고, 일은 잘 풀리지 않았거든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참, 치열하게 살았죠."
그러다보니 자연히 슬럼프가 찾아왔다. 특히 지난 해가 그랬다. 준비하던 영화, 드라마 등이 줄줄이 취소된 것. 드디어 도약하나 했더니 모든 걸 잃은 느낌이었다.
"주연으로 발탁된 작품이 있었는데, 인지도 때문에 밀려났어요. 유명하지 않으니 이런 대접까지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땐 정말 모두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 "벼랑 끝에서 다시, 희망을 얻다"
그때 기적처럼 만난 작품이 '태후'다. 흥행 보증 수표 김은숙 작가가 집필을 맡았고, 주연으로 송혜교와 송중기까지 출연한단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분량은 짧디 짧았다. 1회 오프닝, 유시진(송중기 분)과 단검 액션을 나누는 북한군 안정준 상위. 그게 전부였다. 그것도 어둠 속에서….
"제 분량은 처음엔 1부만 정해져 있었어요. 작가님께서 가볍게 '나중에 또 한 번 나올 수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솔직히 크게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단 5분을 위해, 약 1달을 연습에 투자했다. 특히 송중기와는 하루 5시간 이상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합을 맞췄다.
작은 역이지만, 개성도 살리려 노력했다. "송중기는 민첩한 스타일로 연습했다"며 "나는 그와 달리 조금 투박하고 센 느낌을 주려 신경썼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탄생한 신은 완벽했다. 액션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했고, 지승현의 존재감은 빛났다. 적어도 그 장면에선, 주연 송중기와 대등한 포스를 뿜었다.
◆ "그래서, 안정준 상위는 인생 캐릭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행운 같은 일이 찾아왔다. 지승현의 분량이 대폭 늘어난 것. 후반부 인질극 및 유시진 구출 작전까지 추가 촬영하게 됐다.
"작가님이 1회를 보고, '한 번 크게 키워보자'고 하셨어요. 힘든 시기에 촬영한 건데 반응이 좋으니 기뻤습니다. 그간 흘린 눈물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안정준 상위에겐 스토리가 생겼다. 지승현은 "어느 나라에든 유시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중 북한의 유시진이 바로 안정준 상위"라고 말했다.
원하던 디테일도 마음껏 살릴 수 있었다. 거친 이미지를 위해 탁성을 냈고, 절도 있는 말투를 선보였다. 일본 밀항 신에는 체중을 5kg나 감량하는 열정을 보였다.
"욕심을 냈어요. 병원 인질 신 촬영을 할 땐, 3일간 물도 안 먹었습니다. 좀더 빠져 보이게 하려고요. 국민드라마의 후반부, 이렇게 큰 비중이라니…. 너무 신이 났죠."
자연히 호평 세례도 쏟아졌다. 인질극에선 인기 있는 악역만이 누린다는 악플도 받아봤다. 지.승.현. 드디어 이름 세 글자를 대중에게 알리는 순간이었다.
◆ "지승현의 인생 2막, 지금부터 시작"
쓰러지려던 순간, 또 한 번 희망을 얻었다. 올해로 꼭 10년 차, 연기 인생 2막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다시 꿈을 그려낼 힘이 생겼다.
"태후는 제게 희망을 보여준 드라마에요. '어, 그 북한군' 하는 그 한마디가, 제겐 너무 소중했거든요. 제가 그 역을 그만큼 잘 해냈다는 거잖아요."
단, 쉽게 들뜨지는 않았다. 지금 대중이 보내는 관심은 '태후'의 힘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배를 드는 대신, 겸손히 고개를 숙였다.
"역할이 크든 작든 상관 없어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연기를 펼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진짜 길고 굵게 연기할 거니까요."
앞으로 지승현의 목표는 단 하나다. 좋은 연기를 하는,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것. 그러다보면 언젠가 할리우드의 꿈도 이뤄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지금 정점을 찍은 친구들은 그 이상을 하기 어렵잖아요. 저는 한 걸음이라도 뒤가 아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배우예요. 그러니 지켜봐 주실거죠?"
<사진=서이준기자>